경제 침체시 지갑 닫는 은행, '돈맥 경화' 주범

[새사연의 '생얼' 한국 경제(6)] 자기 잇속 챙기기 바쁜 은행, 그대로 둘 것인가?

등록 2009.06.11 18:12수정 2009.06.11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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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를 맞아 지난해부터 정부와 통화당국은 막대한 자금을 풀어왔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돈이 도는 속도를 말하는 통화유통속도는 오히려 1분기에 사상 최저치로 하락했다. 시중에 보유자금은 늘고 있으나 생산적인 부문으로 흐르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돈맥 경화' 현상이라 이름 붙이고 있다. 이 때문에 경제의 가장 아래쪽에 있는 기업과 가계, 그리고 최근 더욱 어려워진 자영업인들은 자금조달의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다.

 

통화유통속도는 통화 한 단위가 일정 기간 내에 몇 번 상거래에 사용되는지 그 횟수로 측정한다. 정확한 통화량과 상거래액(또는 소득액)을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광의통화 M2의 분기당 GDP 비율을 대체지표로 사용한다. 어쨌든 이 수치가 2007년 0.8 정도이던 것이 2008년부터 급격히 하락해 2009년 1분기에 0.687까지 떨어졌다. 한국은행의 지난 4일 발표에 따르면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이후 최저 수치이다.

 

a  [그림1] 통화유통속도 추세(* 자료: 한국은행 보도자료 종합)

[그림1] 통화유통속도 추세(* 자료: 한국은행 보도자료 종합) ⓒ 새사연

[그림1] 통화유통속도 추세(* 자료: 한국은행 보도자료 종합) ⓒ 새사연

통화는 한국은행이 아니라 금융기관이 창출

 

현대 경제에서 통화는 단순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폐나 주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현금성 통화는 전체 통화에서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금융기관들에 의해서 창출되는 이른바 파생통화가 훨씬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은행은 수신액을 기초자산으로 각종 대출상품과 파생상품을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통화를 창출할 수 있다. 판매된 상품은 다시 은행에 수신될 것이고 은행은 새로운 수신액을 기초자산으로 다시 상품판매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예금-대출 상품으로만 이루어진 가장 간단한 구조에서 BIS 10퍼센트라 가정하면 (10퍼센트를 지급준비금으로 남겨두고 90퍼센트만 대출을 한다는 뜻이다) 이론적으로는 1억의 수신액으로 최대 10억의 총 통화량이 만들어질 수 있다.

 

a  [표1] 예금은행의 통화창출(신용창출) 과정 예(* 주: 지급준비율 10퍼센트, 예금통화만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모형에서의 신용창출 과정임)

[표1] 예금은행의 통화창출(신용창출) 과정 예(* 주: 지급준비율 10퍼센트, 예금통화만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모형에서의 신용창출 과정임) ⓒ 새사연

[표1] 예금은행의 통화창출(신용창출) 과정 예(* 주: 지급준비율 10퍼센트, 예금통화만이 존재한다는 단순한 모형에서의 신용창출 과정임) ⓒ 새사연

 

실제로는 기초 통화 1억 원으로 창출될 수 있는 통화량은 10억 원을 훨씬 초과한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도 한국은행이 창출한 본원 통화에 비해 주로 예금은행들이 창출한 광의 통화(M2)는 약 25배에 달한다.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금융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통화의 종류가 훨씬 다양해지고 그 과정이 복잡해져왔다. 금융기관들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일직선의 단계를 따라 한 종류의 통화를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통화를 서로 거미줄처럼 엮으면서 동시에 창출하고 있다. 워낙 이런 종류와 과정이 복잡한 탓에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통화량에 대한 합의된 개념이 아직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금 막은 곳은 다름 아닌 '시중은행'

 

결국 현재 자금 흐름이 원활하지 않은 것은 통화를 창출하고 중개 기능을 하는 금융기관들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이런 사실을 가장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래의 그림이다.

 

지난 해 미국발 금융충격이 터지기 전까지 활발하게 통화량을 확장해 오던 시중은행들은 정작 금융충격이 터지자마자 통화창출을 급격히 줄였다. 한국은행이 본원 통화 증가율을 최고 30퍼센트까지 늘렸으나, 이를 경제의 세포들에게 중개해야 할 시중은행들은 오히려 광의통화 M2 증가율을 축소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a  [그림2] 통화증가율(전년 대비, %)(* 자료: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http://ecos.bok.or.kr)

[그림2] 통화증가율(전년 대비, %)(* 자료: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http://ecos.bok.or.kr) ⓒ 새사연

[그림2] 통화증가율(전년 대비, %)(* 자료: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http://ecos.bok.or.kr) ⓒ 새사연

 

은행들은 경제가 침체될 때는 먼저 지갑을 닫고 있고, 반대로 경기가 과열될 때는 오히려 대출을 부추겨 왔다. 이런 행태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외환위기 이후 단기 금융상품이나 부동산대출, 그리고 각종 수수료 챙기기 등 수익성에만 몰두하는 행태가 강화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금융 시스템 개혁의 과제

 

안타까운 것은 현재의 금융 시스템에서는 은행들의 이런 행태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미 공공연히 스스로를 (금융)기업이라 칭하는 은행들은 자신의 개별 이익과 은행 주주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을 뿐, 국민경제 전체의 위험은 물론이거니와 취약한 중소기업과 가계의 위험을 나누어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조금 더 구조적으로 짚어 보자면, 이런 냉혹한 은행의 행태가 대단히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은행들은 위험 평가에 기초하여 자금을 운용하고 있으며 이것은 스스로에게 너무나 합리적인 행태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규제당국은 건전성에 기초하여 은행을 규제하고 주식시장은 수익성만을 기준으로 은행을 규율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에 하나 어떤 은행이 자금이 어려운 중소기업이나 가계에 대출을 한다면, 그 은행은 규제당국으로부터 '불법 대출'의 혐의를 뒤집어쓰거나 주주들로부터 압박을 받는 상황에 처할 위험마저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과제는 개별 은행 하나하나의 행태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 자체의 개혁에 있지 않겠는가? 금융기관이 경제의 혈맥이라는 사실, '돈맥 경화'는 바로 그 핏줄의 병목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새삼 되새김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행 중 다행인지, 위기 속에 기회인지 최근 수년 동안 영미식 금융 시스템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늘고 있고 나름의 대안들이 제출되고 있다. 서민은행, 마이크로크레딧 은행과 같은 새로운 은행을 만든다든지, 산업은행이나 우체국과 같이 국가소유 금융기관을 이용해 공적 금융 인프라를 작동시키게 한다든지, 나아가 정부나 중앙은행이 서민자금에 관한한 최종대부자 역할을 한다든지 등등 다양하다. 하나같이 장단점이 있긴 하지만 분명한 공통점 하나가 발견된다. 그것은 금융 시스템의 공공적 성격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 지난 글 "MB 감세정책 발목 잡는 '노무현의 흔적'"에서 한 네티즌의 고마운 지적에 대해 답변할까 한다. 글에서 필자는 현 정부의 감세규모가 '국가재정법'에 정면으로 저촉될 수 있다고 썼고, 아이디 '레종'님은 이런 해석은 과도하다는 지적을 해주셨다. 국가재정법의 법률조항에는 "노력해야 한다"고만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주위에 자문을 구해본 결과, 레종님의 지적이 보다 정확함을 알았다. 해당 조항은 정부의 노력을 권고하고 있지, 의무 조항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기회를 통해 권고 조항과 의무 조항의 차이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다. 현 정부의 감세규모가 국가재정법의 조항에 저촉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을 위법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해 필자가 법률에 문외한인 관계로 표현에 실수를 범했던 점에 양해를 구한다.  이로 인해 혹 피해를 입거나 혼란을 겪으신 분께 사과를 드리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http://saesayon.or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상동 기자는 새사연 경제연구센터장입니다.
#돈맥경화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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