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전, 그녀의 볶음밥은 꿀맛이었다

[비와 음식] 그런데 아내의 볶음밥은 '너무 다르다'

등록 2009.07.12 17:02수정 2009.07.1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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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이 비 오는 날이 이어지면 어느새 난 그때로 돌아간다. 그녀를 만나고 몇 달이 되지 않은 여름의 한 날, 그날도 오늘처럼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고 사정없이 소낙비가 들었다. 수숫대에서는 스스시시 서로 몸 비비며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나뭇가지는 우들우들 떨었다.


내가 그녀를 방금 만나고도 가슴에서 그녀가 떠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놈의 날씨 탓인지도 모른다. 그리움을 가슴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공중전화 부스로 또 달려가고 말았다. 우두둑 우두둑 굵은 빗방울이 부스 위로 떨어지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전화기 저쪽에서 '여보세요'를 외치면 내 심장의 고동소리 때문에 빗소리는 어느새 사라졌다.

28년 전, 그녀의 볶음밥은 꿀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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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음밥1 우리부부의 볶음밥은 계란프라이, 묵은지, 햄을 먼저 볶는다. ⓒ 김학현



"나!"
"어? 방금 만나고 또 전화했어요?"
"응! 보고 싶어서."
"어? …."

그러곤 서로 숨소리만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것만으로도 서로의 사랑이 전화선을 타고 간다고 믿었다. 그때는. 그러다가 저쪽에서 그녀가 못 이긴다는 듯 말했다.


"그럼, 우리 집으로 와요."

얼씨구나, 전화기를 집어던지고 버스를 탔다. 너무 급한 나머지 기숙사 입구에 굴러다니던 우산을 하나 들고 간다는 게 하필 찢어진 우산일 게 뭐람. 바람과 빗줄기가 휘두르고 지나간 내 몰골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금은 생각만 해도 우습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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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음밥2 그런 후에 밥을 얹어 볶는다. ⓒ 김학현


단벌 바지는 흠씬 젖었고, 단벌 구두는 물이 흥건했다. 받치고 간 우산은 너덜너덜하고, 그런 몰골로 그녀 앞에 선 나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찢어진 우산 하나 받치고 내리 때리는 소낙비의 몰매를 맞고 문밖에 서있는 물에 젖은 생쥐 모양의 내 모습을 본 그녀는 기가 찬 모양이었다.

"어서 들어와요. 내 참 못 말린다니까. 아니, 몰골하곤 혼자 보기 아깝네요."
"그렇게 흉해?"

대강 그녀가 준 수건으로 이곳저곳을 훔치고 자리에 앉았을 땐 저녁 끼니 때가 훨씬 넘었던 듯하다. 그녀가 제안을 했다. 저녁 먹자고. 그러곤 한참을 부엌에서 나오지 않더니 거의 한 시간 만에 차려 내온 메뉴가 볶음밥이었다. 시원한 계란 국물과 볶음밥 한 접시, 난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비가 오는 날이면 여지없이 떠오르는 추억 속의 볶음밥.

난 그때 볶음밥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렇게 맛있는 볶음밥은 먹어 본 적이 없다. 비가 오면 여전히 그녀의 볶음밥이 생각난다. 그러다보니 여지없이 오늘같이 비오는 날이면 볶음밥을 해먹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그녀의 대답은 대강 이렇다.

"그럼, 당신이 볶아요. 재료 만들어 줄 테니."

28년 후, 프라이팬에 숟가락 두 개 꽂아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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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음밥4 맨 마지막에 참깨와 참기름을 뿌리고 숟가락 두 개 덩그러니 꽂는다. ⓒ 김학현


그렇게 툭 한 마디 던지곤 이내 묵은지며 햄, 야채 등을 도마에 얹고 썰어댄다. 이때부터 28년 전의 낭만은 사라진다. 열심히 주걱을 휘저으며 계란프라이로부터 시작하여 다 썬 야채를 넣고 볶는 데까지. 깨소금 술술, 참기름 한 숟가락까지. 불 위에서 하는 모든 작업은 몽땅 내 몫이다.

계란 국물은 없다. 계란 국물은커녕 국물은 아예 없다. 접시에 예쁘게 담겼던 그때의 볶음밥은 그냥 프라이팬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한 채 숟가락 두 개 쿡 찔러 넣어 식탁 위에 놓인다. 어기적어기적 입안으로 쑤셔 넣지만 추억과 낭만의 기대와는 달리 입안에서 모래알이 될 뿐이다.

"여보, 이거 퍽퍽해서 먹기가 힘드네."
"거참, 잔소리 많네. 그냥 드셔요. 물 있잖아요? 언제 국 끓여요? 귀찮게."

난 그리 잘 넘어가지 않는 볶음밥인데 그녀에겐 그냥 예전처럼 맛있는 볶음밥인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냉장고를 뒤져 음료수를 꺼내 마시면서 볶음밥의 목 넘김을 돕는다. 그렇게 프라이팬의 볶음밥이 줄어갈 즈음 아내는 외친다.

"참 당신은 이상해요?"
"뭐가?"
"왜 자꾸 남의 쪽 밥을 넘봐요? 당신 쪽의 것이나 드세요."
"응? …."

그녀의 말에 프라이팬을 보니 내 쪽 밥은 그대로인데, 그녀 쪽 것은 거의 바닥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녀 쪽의 밥을 먹은 것이다. 프라이팬의 테두리가 높아 이쪽보다는 아내 쪽이 잘 보이니 나도 모르게 한 짓인데, 그녀는 꼭 그걸 지적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알았어! 내 참 드러버서."

한 마디 내뱉곤 내 쪽의 밥을 퍼 그녀 쪽으로 밀어붙인다. 좀은 기분 상한 태도를 극렬히 드러내면서.

사랑하는 그녀도, 볶음밥도 그대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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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음밥3 고추장을 조금 푼 후 맨 나중에 야채를 듬뿍 넣는다. ⓒ 김학현


28년 전 그녀가 차려주던 볶음밥은 그저 내 환상 속에서만 살아있다. '추억은 추억일 뿐 그리워하지 마세요!' 이 말이 딱 맡는 말이다. 내가 보기엔, 연애시절 그녀가 차려준 볶음밥은 지금의 볶음밥보다 재료도 별로고, 아직 주부되기 전이니 그렇게 음식솜씨도 좋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다. 하지만 정말 맛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공동작업으로 탄생하는 볶음밥은 재료는 물론 숙련된 두 요리사(?)가 그럴 듯하게 빚어내는 볶음밥이다. 그런데도 옛 맛이 안 난다. 비가 내리는 풍경도, 사랑하는 그녀도, 볶음밥도 그대로인데 맛은 그때 그 맛이 아니다. 28년이란 세월이 음식 맛도 변하게 하는 건지.

그러나 우리 부부는 여전히 비가 오는 날이면 볶음밥 타령이다. 그 드러난 이유는 추억을 먹어보겠단 거고, 뒤에 숨은 진짜 이유는 음식 만들기 귀찮으니 이것저것 넣고 볶아 그걸로 한 끼니 때우자는 속셈이다.

사랑을 가득 담아 애인에게 해주던 볶음밥과 비오는 날 대강 먹는 볶음밥, 그 맛의 차이가 추억의 강을 훌쩍 넘는다. 오늘같이 비오는 날에는.
#비오는 날 #볶음밥 #애인 #아내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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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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