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계곡 입구
노윤영
천오백 원 하는 입장권을 구입하고 입구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올라갔다. '국민관광 제1호로 지정된 이곳 무릉계곡은 청옥산과 두타산을 배경으로 어쩌고저쩌고∼.' 무릉계곡 소개 문구가 쓰인 팻말을 띄엄띄엄 보았지만 도무지 글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다 읽는 건 포기했다.
입구 근처 강 위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다. 실은 그보다는 그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아저씨가 더 눈에 띄었지만. 땅에 쓰인 해독 불가능한 한자들을 정확히 이십초 가량, 그것도 예의상 봐주고는 냅다 발걸음을 돌렸다. 나처럼 팔자 좋은 청년 몇 명, 언제나 유쾌한 아줌마 부대가 멀리서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들은 어디까지 갈까. 참, 나는 어디까지 가야하지? 무릉계곡이 목표였나, 아니면 산 정상이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 때부터 세월아 네월아, 목적 없는 내 산행이 시작되었다. 하이얀 거품 내며 맑게 흐르는 물을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강 한 가운데 놓인 커다란 바위 몇 개를 발견하고는 도대체 저건 누가 저기다 갖다 놓았는지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고민해 보기도 했다. 좁은 길에서 이따금 유쾌한 부녀회 아주머니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그들은 처음 보는 나에게도 기꺼이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다. 산에서는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그 당시에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갈래 길이 날 유혹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이리로 가면 뭐가 나오고, 또 저리로 가면 뭐가 나오려나. 내가 가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거대한 기계 속에서 잘 조여진 톱니바퀴처럼 자란 이들에게 이런 여정은 더욱 각별하다.
서점의 어학 코너 직원으로, 출판사 편집부 막내 직원으로, 중소 신문사의 일개 취재기자로. 강원도 철원 모 부대의 일반 병사로, 4년제 대학 문예창작과의 어수룩한 학생으로, 한 가정의 아들로, 누군가의 오빠이자 불편한 짐으로. 너무 오랫동안 누군가의, 무언가의 무엇으로 다듬어졌다. 모나지 않게, 튀지 않고 최대한 중간만 하고 싶었지만 언제든 나는 구석으로 몰리거나 밖으로 쫓겨났다. 다들 사는 만큼만 산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본 후부터 낯선 여행지에서 매혹적인 여자와의 만남을 꿈꾸었다. 정해진 것도 없고, 목적지도 분명하지 않은 여정에서의 특별한 인연이란 언제나 짜릿한 일 아닐까. 물론 끝도 없이 울퉁불퉁 놓인 산길의 곳곳을 거닐다가 그럴듯한 연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보이는 이라고는 머리 빡빡 깎은 남정네와 걷는 것도 힘겨운 노부부,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이 언제나 유쾌한 아주머니 관광객들뿐이었다. 물론 예쁜 여자를 만났다 치더라도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할 숙맥에 불과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