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를 포기하고 떠드는 아이들 앞에 서다

아이들에게 무서운 교사가 되고 싶지 않은 이유

등록 2009.09.05 21:40수정 2009.09.07 10:47
0
원고료로 응원

가을입니다. 봄과 여름 두 계절을 전남 담양 교육연수원에서 보내고 학교에 복귀하여 2학기를 맞이했습니다. 개인적인 건강 문제로 1개월 호주 해외연수에 불참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5개월의 국내 연수만으로도 영어교사로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만큼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연수를 다녀와 확연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이 종전에 비해 길어졌다는 것입니다.

 

2학기 첫 수업시간, 아이들은 아리따운 처녀 선생님 대신 느닷없이 나타난 늙수그레한 새 영어선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교실을 들어설 때부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던 한 아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오늘만 오시는 거예요? 앞으로 계속 오시는 거예요?"

 

저는 빙그레 웃으며 그 아이에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1학기 때 영어선생님과 많이 친했던 모양이구나?"

 

그리고는 연수를 받느라 2학기에야 수업에 들어오게 된 사정을 말해주었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뜸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무서우세요?"

 

너무도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되묻고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 짝꿍과 장난을 치기에 여념이 없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잘못 걸린 것 같다. 나 아주 무섭거든."

 

하지만 눈에 장난기가 가득한 그 아이는 이미 저의 성향을 간파한 눈치였습니다.  

 

며칠 뒤였습니다. 저는 수업을 하다말고 잠시 팔짱을 낀 채 침묵을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흥미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수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 준비한 수업자료들이 무색할 정도로 교실 분위기가 산만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타일러도 막무가내로 떠들어 대는 아이들 앞에서 저는 참으로 무력한 교사였습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서운 교사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이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저에게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들 앞에서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는 선언을 이미 해버린 뒤였고, 심지어는 매는 고사하고 화를 내면 벌금을 내겠노라고 교사로서는 무장해제나 다름없는 말을 서슴없이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경솔한(?) 말을 해버린 것인지, 앞으로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순간, 저도 모르게 아이들 앞에서 버럭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너희들 정말 비굴하구나.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해도 매를 대지 않겠다고 하니까 이렇게 막무가내로 떠드는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내가 매를 들면 너희들 금방 조용해지겠지. 그렇게 해줄까? 그래, 아무래도 너희 반은 안 되겠다. 내일부터는 여기에 몽둥이를 하나 갖다놓고 수업을 해야겠다. 너희들 내가 얼마나 무서운 선생인지 곧 알게 될 거야."

 

이렇게 정신없이 말을 퍼부어대고는 아차 싶었습니다. 화를 내면 벌금을 내겠다고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된 탓인지 저에게 벌금을 내라고 다그치는 아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교정을 빠져나오면서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할 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물론 아이들에게 공표한 대로 친절서약을 파기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 잘못은 교사의 인격적인 지도에 불응한 아이들에게 돌리면 되겠지요.

 

그 다음 수업 시간, 저는 출석을 부르기 전에 아이들 앞에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사과의 뜻을 표했습니다.

 

"어제 수업시간에 화를 내서 죄송합니다. 특히 여러분에게 비굴하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포기할 것처럼 말한 것도 사과드립니다. 물론 여러분에게도 잘못은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여러분 앞에서 한 약속을 며칠도 안 되어 깨뜨린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그럴 바엔 처음부터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에게 약속한 대로 더욱 친절한 교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자기를 사랑하겠다고 한 선생님과의 약속을 꼭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해준 대신 아이들에게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꿈을 갖지 않거나 자기를 가꾸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탓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지요. 사실, 교사에게는 불편한 족쇄가 될 수도 있는 저의 친절서약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서약을 하도록 하는 일종의 전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말을 해주고 난 뒤 저는 한 번 더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에 출석부를 펴고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출석을 부르면 아이들은 저와 눈을 맞추고 영어 문장을 하나씩 외워야 합니다. 가령, 이런 식이지요. 

 

"강 아무개"

 

"I have a dream(나에겐 꿈이 있어요)"

 

"김 아무개"

 

"I am happy(난 행복해요.)

 

"이 아무개"

 

"I love you.(선생님 사랑해요.)

 

그런데 그날 한 아이의 대답이 저를 울렸습니다. "선생님, 무서우세요?" 하고 당돌하게 물었던 바로 그 아이였습니다. 언제 그런 맑은 영혼을 눈망울 가득 담고 있었는지 싶게 아이는 저를 깊이 응시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I love myself(난 나 자신을 사랑합니다.)

2009.09.05 21:40ⓒ 2009 OhmyNews
#순천효산고등학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쿠데타 막다 옥살이, 63년 만에 무죄 받아든 아들의 한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