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를 숭배하기보다는 삶과 정신을 배워야"

[20대 전태일을 만나다 '동행' ③] 솥발산 열사 묘역을 참배하다

등록 2009.11.02 15:49수정 2009.11.0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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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감옥에서 단식농성을 벌이다 위궤양이 약화되어 출감하게 되었다. 동지는 출소한 뒤에도 열심히 전교조 활동을 하던 중 위의 통증을 견디지 못해 입원했는데, 그때 이미 동지의 건강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1991년 3월 9일 '눈만이라도 남아 동지들이 복직하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라는 유언과 함께 두 눈을 장기 기증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부산울산경남 열사정신계승사업회 자료집"


1991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합법화 투쟁을 열심히 하다 돌아가신 신용길 선생님의 죽음을 시작으로 부산, 경남, 울산 지역의 열사들이 솥발산에 묻히기 시작했다.

울산과 양산 사이에 있는 솥발산!

a  솥발산 묘역 열사, 희생자 안내도

솥발산 묘역 열사, 희생자 안내도 ⓒ 배성민


"한국 현대사의 민중들의 투쟁 과정에는 수많은 열사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열사들은 외세와 독재, 자본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노동해방과 자주, 통일을 외치며 스스로의 목숨을 초개처럼 바쳤고, 폭압기구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지병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묘역은 이렇게 자신의 한 몸을 바쳐 세상에서 이어 나가는 모든 이들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참 평등 세상 그날까지 민중들과 영원히 함께 호흡하며, 정의의 상징으로 이곳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솥발산 열사묘역 참배 안내판"

솥발산은 울산 웅촌면(과 상동면), 경남 양산 하북면 사이의 경계에 있으며 높이 700m의 바위산으로 가지산도립공원에 속하는 산이다. 이 산자락에 공동묘지가 있는데, 많은 공동 묘지 중 37곳이 열사 묘역이다. 원래(2005년까지) 31명의 열사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지만, 4년 사이에 6명의 열사가 더 생겨 지금은 총 37명의 열사들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11월 1일 일요일 [20대 전태일을 말하다] 전국노동자대회 실천단 '동행'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학생들이 솥발산 열사 묘역 참배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열사회 대표를 맡고 있고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지회장인 윤국성 대표가 학생들이 노동 열사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고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해주었다.


a  부산울산경남 열산정신계승회 대표이자 한진중공업 지회장을 맡고 계신 윤국성 대표님

부산울산경남 열산정신계승회 대표이자 한진중공업 지회장을 맡고 계신 윤국성 대표님 ⓒ 배성민


실천단 단원들은 점심시간이라 싸온 김밥을 간단하게 먹고 윤국성 대표의 안내로 솥발산 열사 묘역 참배가 시작되었다.

호루라기 사나이 배달호


a  노동열사 배달호 열사의 묘

노동열사 배달호 열사의 묘 ⓒ 배성민


가장 먼저 2003년 두산중공업에서 일하다 분신하신 배달호 열사를 만났다. 일명 '호루라기 사나이'라고 불릴 만큼 대의원 조회 때고 중식집회 때고 늘 호루라기를 불며 조합원들의 참여를 독려 했었다, 그리고 열사의 부인은 '빨래 할 때마다 주머니에서 호루라기가 나왔다고' 할 정도로 호루라기를 매번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2000년 12월 공기업이었던 한국중공업을 두산재벌이 인수하면서 현장 노동조합은 더욱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맞서 노조의 파업 투쟁에 헌신적으로 임했던 배달호 열사는 부당해고, 징계를 받으며 심지어 구속을 당했고 출소 이후에도 재산가압류, 통제, 감시를 받아왔다고 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아 결국 분신을 택하게 되었다.

"배달호 열사가 분신했던 그 시대에는 재산가압류라는 것이 노동조합원들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이것은 사측이 파업에 따른 손실을 모두 노동자에게 전가했던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잠잠하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다시 이것이 부활하고 있습니다." -윤국성 대표

"왜! 죽음으로 모든 짐을 지려고 하셨나요?"

a  노동해방열사 김주익의 묘

노동해방열사 김주익의 묘 ⓒ 배성민


다음으로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은 김주익, 곽재규 열사였다. 두 열사의 묘지는 따로 떨어져 있지만 서로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김주익 열사는 2003년 10월 17일 크레인 농성을 하다 목매 자결한 열사이다. 당시(2002년) 한진중공업에서는 두산중공업과 같이 노동조합을 탄압하기 위해 50대 노동자 650명의 해고하고 이를 반대 하는 노조에 7억 4천만원의 손배가압류를 때렸다. 이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측은 문제를 방관하였다. 이에 김주익 열사는 당시 한진중공업지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자신이 운전하는 크레인에 올라가서 '해고자 복직! 손배가압류 철회!' 등의 구호를 외치며 129일간 고공농성을 했었다. 이런 투쟁에 사측은 노조에 150억의 손배가압류를 하겠다고 압박을 넣자 김주익 지회장은 자결을 하게 된다.

곽재규 열사는 김주익 지회장의 죽음에 괴로워하던 중 2003년 10월 30일 김주익 열사가 목매 자결했던 그 장소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김주익, 곽재규의 죽음은 같은 회사를 다니는 윤국성 대표에게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하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a  노동열사 곽재규의 묘 "열사의 염원을 우리들이 지켜나가겠습니다."

노동열사 곽재규의 묘 "열사의 염원을 우리들이 지켜나가겠습니다." ⓒ 배성민


"곽재규 열사 같은 경우에는 고향 학교 선배입니다. 그 당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재규 형 부인이 저한테 원망을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형이 자결하는 그날 이상하게 재규 형의 태도가 이상했어요. 언제나 힘든 일정에도 우리 회사의 문제를 사회에 알리겠다고 부산 방방 곡곡을 뛰어다니던 분이 그날은 '밖에 안 나가면 안되나'라고 하시더라구요. 전 그날 형이 몸이 안 좋으시나 해서 그냥 회사에서 선전전을 진행하시라고 했습니다. 참 후회가 됩니다. 그 때 제가 재규 형을 회사 밖으로 보냈어야 했는데… -윤국성 대표."

윤국성 대표님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다른 묘지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곽재규 열사의 묘 뒷면에 딸이 쓴 편지가 보였다.

"주익이 아저씨와 아빠가 친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죽을 필요까진 없었잖아. 아빠가 아끼고 사랑한 동생이었다면 돌아가신 주익이 아저씨를 위해 더 노력하여 이 일을 해결하려고 하셔야지요. 왜! 죽음으로 모든 짐을 지려고 하셨나요. 하지만 아빠가 얼마나 가슴 아프고 슬퍼했을지 느낄 수 있어요." -2003. 11. 16 큰딸 경민이가 아빠를 보낸 편지 중 발췌

a  김주익 열사의 딸의 편지 "2003. 11. 16 큰딸 경민이가 아빠를 보낸 편지 중 발췌"

김주익 열사의 딸의 편지 "2003. 11. 16 큰딸 경민이가 아빠를 보낸 편지 중 발췌" ⓒ 배성민


배달호, 김주익, 곽재규 열사 외에도 1990년 한진중공업 위원장을 맡았던 박창수 열사의 의문사, 현대미포조선 하청업체에 근무하며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고 외치며 자결했던 박일수 열사, 울산건설플랜트노조에서 열심히 활동하다 태화강에 투신하던 여성을 구하려다 죽음을 맞이한 주민칠 열사 등 제각각의 사연을 가진 37명의 열사들의 묘가 안치되어 있었다.

"열사를 숭배하기 보다는 그들의 삶과 정신을 배워야"

a  최대림 열사의 묘 앞에서

최대림 열사의 묘 앞에서 ⓒ 배성민


솥발산 열사 묘역을 참배하고 실천단 '동행' 단원들끼리 둥글게 서서 각자 소감을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사회적 현실에 맞서 싸우다 돌아가신 열사 라는 분들이 70-80년대만 있는 줄 알았다. 근데 90년대 아니 최근 2009년도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책에서만 이런 얘기 듣다 직접 묘역을 참배하니 감회가 새롭다. 난 '비정규직 철페 투쟁 결사 투쟁!' '노조 탄압 분쇄 투쟁! 결사 투쟁!' 등 과격한 구호에 반감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가지게 하는 구호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사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오늘 듣고 나니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이런 과격한 구호를 통해서라도 당시 자신들의 문제를 알리고 싶은 절박함이 느껴졌다. 앞으로는 이런 목소리에 대해서 귀 기울여 들어야 겠다."

"진보진영 내부에서 열사에 대해 숭배하는 의식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었다. 왜냐하면 열사의 죽음을 숭배하며 그들을 무조건적인 희생 덕에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너무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오는 것도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윤국성 대표님을 통해 열사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수 많은 열사들에게 본받아야하는 것은 그들의 죽음이 아니라 그들이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삶의 태도와 정신인 것이다."

a  실천단 단원과 김영남 단장

실천단 단원과 김영남 단장 ⓒ 배성민


전국노동자대회 실천단 '동행'의 일정이 반이나 지나갔다. 하지만 아직 1주일 간의 일정이 남아있다. 이번주(11월 첫째주)에는 부산대학교에서 열리는 비정규교수 및 택시노동조합 간담회(11월 3일 7시 사회대 301호)와 동국대 경주캠퍼스에서 열리는 개청춘 영화제(11월 4일 7시)와 서울 전국노동자대회 참가 등이 있다.

다음 기사는 부산대학교 비정규교수 및 택시노동조합 간담회에 관한 기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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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성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실천단 '동행'의 기사 원고료는 모두 실천단 '동행' 후원금으로 지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실천단 '동행'의 기사 원고료는 모두 실천단 '동행' 후원금으로 지원합니다.
#솥발산 #전국노동자대회 #배달호 #김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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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부산본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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