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저널리스트의 공통점과 차이점

[取중眞담] 엄기영을 보면서 정연주를 떠올리는 이유

등록 2009.12.11 11:32수정 2009.12.1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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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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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오른쪽)이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제46회 방송의 날 기념식'에서 엄기영 MBC 사장과 인사를 나눈 뒤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 ⓒ 유성호


딱 한번 엄기영 MBC 사장을 실제로 봤다. <대기자 김중배> 출판기념회 때다. 시작보다 앞서 도착한 그는 연신 담배를 물고 있었다. 입가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지나는 대중과 친절하게 눈인사를 나눴다. 내 머릿속 카메라에 찍힌 이 장면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올 2월 26일 기자 50주년을 기념해 책을 낸 김중배 전 MBC 사장은 한나라당이 국회에 기습 상정한 미디어악법을 성토했다. 이 땅에 저널리스트가 있느냐고 개탄했다. 엄 사장도 이에 동참했다.

엄 사장은 "기자인생 50년 가운데 문화방송에 몸담으신 것은 고작 2년에 불과하지만 지금 같은 시대에 김 사장님이 계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면서 "시장에, 또는 힘에 의해 방송의 공공성이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안고 있는 과제"라고 말했다.

엄 사장은 "힘이 부칠 때마다 김 사장님의 2년을 기억하면서 스스로 담금질하겠다"고 강조했었다.

김중배와 엄기영

그로부터 6개월 뒤 방송문화진흥회에 새로운 이사진이 구성됐다. 소위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 대거 포진됐다. 뜨거운 여름, 방문진을 접수한 그들은 MBC에 대한 섭정을 시작했다.

MBC 간판 프로부터 손보려 들었다. <PD수첩> <100분토론> 등이 그것이다. 심지어 김광동 이사는 프로그램 통폐합까지 주문했다. <2580>과 <PD수첩>, <뉴스후>는 성격이 같은 프로그램인데 합쳐도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말도 했었다. 쌍용차를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노동자 얘기만 다루지 말고 사측의 입장을 동등하게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입장을 공평하게 다뤄주는 것이 공정보도라고 규정했다. MBC 내부에서는 저널리즘의 기본을 모르는 처사라고 항의가 빗발쳤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방문진 뉴라이트 이사들은 초기부터 엄 사장의 군기를 잡았다. 만성적자 구조의 방만경영 해결과 단협에 명시된 국장책임제, 공정방송협의회 규정 등이 노영방송의 근거라며 개정을 주문했다. <PD수첩> 번역문제와 <100분토론> 시청자의견 문제 등도 조목조목 따졌다.

엄 사장은 2주에 한번씩 방문진으로 불려가 방문진 뉴라이트 이사들에게 비판을 들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엄 사장은 뉴MBC 이노베이션 플랜을 만들고 11월 30일까지 시간을 달라고 했다. 성과를 내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뉴스는 연성화됐고 프로그램은 예전보다 날카롭지 못했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진행자 교체 시비가 붙었고 라디오 피디들이 싸워 김미화씨를 지켜냈다. <100분토론> 폐지론이 고개를 들었지만, 진행자 교체 선에서 마무리 됐다. 

이 모든 상황은 엄 사장과 MBC 구성원들에게 모욕이었을 게다. 정상모 이사는 이 같은 방문진의 간섭을 비판하면서 '방문진의 MBC 섭정을 즉각 중단하라'고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엄 사장이 방문진에 의해 한창 휘둘리던 8월, 1차 자진사퇴 대공세가 시작되던 때, MB정권으로부터 먼저 강제해임된 정연주 전 KBS 사장은 <오마이뉴스> 글을 통해 엄 사장에게 공개편지를 보냈다. 핵심은 절대로 스스로 먼저 물러나지 말라는 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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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전 KBS 사장 KBS 사장 재임시절 회사에 1,892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배임)로 불구속 기소된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지난 8월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 유성호 기자


엄기영과 정연주

정 전 사장의 편지를 엿보자.

"오늘, 엄 사장 당신에게 편지를 쓰게 된 까닭은 당신이 처해 있는 지금의 상황, 당신이 가슴 저미게 느낄 고뇌와 고통, 북풍 휘몰아치는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외로움을 제가 지난해 비슷한 처지에서 절실하게 경험한 터여서, 그 고뇌와 고통,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중략)

그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코 스스로 물러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당신의 모습이나 인품이 신사여서, 이런저런 모멸에 '에이 더러운 것, 나쁜 사람들, 그냥 떠나자', 그렇게 할지도 몰라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던지고 나면, 후배들은 어찌 되며, 방송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는 MBC는 어떻게 되며,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최소한 저들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폭로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역사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포클레인으로 당신을 강제로 들어낼 때까지 그 자리에서 의연하게 버티셔야 합니다.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많은 벗들이 당신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그리하리라 확신합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씩 웃으면서, 그리고 한국 방송 앵커의 상징적 존재로서 자존심을 지키면서 말이지요."

정 전 사장은 엄 사장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스스로 물러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이다. 정 전 사장은 2003년 4월말 사장으로 취임할 때부터 조중동과 한나라당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다. 책임지고 물러나라는 말은 한나라당의 단골메뉴가 되기도 했다.

입만 열면 '지상파 방송 때문에 잃어버린 10년'을 살았다고 주장해온 현 정권은 정 전 사장의 강제해임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조중동이 앞장서서 사퇴여론을 불피웠고 뉴라이트 단체와 감사원, 국세청, 검찰 등 권력기관이 총동원됐다.

정연주 전 사장의 강제해임은 이명박 정부의 공동작품이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럼에도 정 전 사장은 버텼다. 그 이유를 원칙의 문제라고 꼽았다.

원칙을 다시 말하는 이유

정연주 전 사장은 엄 사장에 보낸 편지에서 "모욕과 핍박, 인신공격을 당하면서도 내 발로 걸어나지 않고 해임이라는 강제수단으로 쫓아낼 때까지 버티게 해준 것은 단순하게도 원칙의 문제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공영방송 KBS에는 정치적 독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 정치적 독립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바탕은 공영방송 KBS 사장의 임기 보장이라고 믿었다"며 "그것을 지켜내는 일은 우리 사회가 그동안 자유, 민주, 인권, 평화, 평등을 위해 온갖 희생과 고난을 치르면서 성취한 것 중 하나인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일이라고 믿었다"고 소회했다.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회적 책무였고, 다른 한편으로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을 역사의 축복으로까지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자신에게 이 같은 기회를 준 것은 역사의 축복이며 이를 통해 역사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썼다.

정 전 사장은 이 글에서 "엄 사장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었다"며 "개인적으로 힘들고, 온갖 모욕과 비난과 인신공격이 당신에게 가해지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를 견디어 내야 하는 것이 바로 MBC 사장이 지금 이 시점에 우리 역사 앞에서 감당해야 하는 책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엄 사장은 이런 권고와 자신의 판단을 어떻게 한 것일까. 혹 개인의 영달을 위해 후배들과 국민 전체에게 큰 짐을 준 것은 아닐까.

물론 엄 사장과 정 전 사장을 비교할 수는 없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다른 존재다. 정 전 사장은 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시절 언론자유를 위해 싸웠던 동아투위 멤버다. 언론민주화운동에 몸담아온 '언론운동가'다. 김중배 전 MBC 사장처럼.

엄 사장은 그와 다르다. 일평생 MBC 안에서 기자를 했고 앵커를 오래했다. 대한민국의 국민앵커 아닌가. 살아온 결이 다르다. 엄 사장에게 정 전 사장처럼 하지 못하느냐고 다그칠 생각은 없다. 그 자체가 엄 사장에겐 부담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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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문화진흥회 일부 이사들이 MBC 경영진에 대한 자진 사퇴를 압박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방송문화진흥회에서 열릴 방문진 정기이사회장 앞에서 MBC 노조원들이 MBC 장악 시도 저지와 언론자유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위대한 저널리스트는 죽었나

닮은 게 있다면 엄 사장도 정 전 사장도 태생적 저널리스트라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의 옳고그름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들이라는 게다. 원칙을 벗어난 일에 대해 정치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그가 살아온 결에 따른다 해도 그의 이름값에 상당히 '기스'나는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민들에게 좋은 평가와 이미지로 서 있던 엄기영 사장은 후배 4명이나 내쫓은 상태에서 방문진의 재신임을 받으면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됐다.
#엄기영 #정연주 #김중배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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