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눈 왔다, 하루쯤 푹 쉬어 보자

[인천 골목길마실 73] 자동차를 멈추게 하는 큰눈인데

등록 2010.01.04 16:01수정 2010.01.0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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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집 2층에서 내려다보는 눈. 우리 집 문간 작은 나무에도 눈이 소복히 덮였습니다. ⓒ 최종규


새해 첫날에 세 식구가 작은 집 작은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루를 보냈습니다. 지난해에는 전철을 타고 일산 옆지기 부모님 댁을 찾아갔지만, 올해는 옆지기가 몸이 나빠서 그저 집에서 세 식구가 붙어 지내며 추위를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낮나절, 옆지기가 '김치에다가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고 싶다고 넌지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내일 택시 타고 일산에 가자!" 인천에서 일산까지 택시로 달리면 4만 5천 원 남짓 나옵니다. 오가는 찻삯까지 헤아리면 십만 원이 날아가지만, 몸아픈 사람 달래는 일보다 돈이 더 클 수 없기 때문에 홀쭉한 주머니를 더 털기로 합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 신포시장 오래된 양과자점에서 여섯 가지 양과자를 여섯 근 삽니다. 마른오징어를 열 마리 삽니다. 여기에 신포시장 큰만두와 큰찐빵을 사천 원어치 삽니다. 옆지기 부모님 댁에 드리려고 풀무학교생협과 한살림생협에서 받아 놓은 유기농 누런쌀 두 가지 십팔 킬로그램을 여행가방에 꾹꾹 눌러담습니다. 아기는 옷으로 꽁꽁 싸매고 옆지기가 안습니다. 쌀하고 선물보따리는 제가 이고 지고 끕니다. 아빠는 짐꾸러미를 껴안은 채 엉금엉금 걷다가 눈 쌓여 얼어붙은 비알진 골목에서 한 번 미끄러지며 엉덩이를 쿵 하고 찧습니다. 찧은 자리는 며칠이 가도록 벌겋게 멍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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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천천히 거닐었습니다. 거의 무릎까지 빠지는 눈밭을 헤치면서, 그동안 보지 못한 숱한 모습을 만났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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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나무전봇대에도 흰눈이 소담스레 쌓였습니다. ⓒ 최종규


그날 가서 그날 오기로 하고 택시를 잡아서 일산으로 달리는데, 택시 아저씨가 오만 원을 부릅니다. 오천 원 바가지임을 알고 있으면서 '명절이니 덤으로 드리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산 옆지기 식구들이 새 보금자리로 짐을 옮겨야 합니다. '날씨가 좀 풀리면 옮기자'고 하기에, 갑작스레 하루밤을 더 묵기로 합니다. 갈아입을 옷이 없으나, 그냥 입던 대로 하루밤 묵습니다. 이튿날 바리바리 짐차에 짐을 실어 옮기고 낮나절은 길게 잠을 잡니다. 옆지기하고 장모님은 찜질방에 다녀옵니다. 해가 가물가물 기울 듯한 저녁나절에 다시금 택시를 부르고 인천집으로 돌아옵니다. 밀린 일이 있고, 월요일 아침에는 일산 식구들이 일 나가느라 집이 빌 테니 우리도 몸이 고단하더라도 저녁에 곧바로 돌아가자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하여 1월 3일 저녁에 택시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오는데, 택시삯이 3만 3천 원만 찍힙니다. '미터기가 망가졌나?'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만, 어제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번도 막힌 적이 없을 뿐더러 길이 퍽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명절에 몰아 주시니 저희가 고맙지요." 하면서 칠천 원을 더 얹어 4만 원을 택시삯으로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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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안쪽 깊은 자리 조용한 작은 마당 나무와 빨래줄에도 눈이 쌓입니다. ⓒ 최종규


그러고 오늘 아침. 엊저녁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밤에 눈이 내릴 듯하다고 생각했는데 참말 눈이 펑펑 쏟아집니다. 아침에 눈이 오면 사진기를 들고 마실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아주 큰눈이 쏟아집니다. 속으로 생각합니다. '어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못 올 뻔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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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길마저 하얗게 덮은 눈입니다. ⓒ 최종규

아침일을 그럭저럭 마무리짓고 옷을 단단히 여미어 밖으로 나옵니다. 집임자 할배는 벌써 계단 눈을 다 쓸어 놓았습니다. 집 앞 길가에는 삼십 센티미터가 넘을 듯한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습니다. 오가는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습니다. 내동 성공회성당을 스쳐 자유공원까지 가는 길에 차는 고작 한 대를 보았습니다. 집집마다 한두 사람씩 나와서 길에 쌓이는 눈을 치우고 있을 뿐입니다.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자유공원 공원매점 지붕에도 눈은 수북하게 쌓여 있습니다. 고향 인천에서 이처럼 큰눈을 맞이한 지는 꽤 오랜만이라고 느낍니다. 날씨도 큰눈이 내리는 날에 걸맞게 제법 찹니다. '겨울이라면 이래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겨울이라면 이만한 날씨에 이만한 눈이어야지' 하는 생각이 뒤잇습니다. '요새 아이들이 제아무리 학원이다 입시다 하고 쫓기더라도 이런 날에는 모든 공부와 학원과 영어학교와 과외를 잊고 눈판에서 뒹굴며 눈놀이를 즐기고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굴리면 참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아침 여덟 시 반부터 열두 시까지 골골샅샅 골목마실을 하면서 '눈싸움 하는 아이'는 하나도 못 보았습니다. '눈사람 굴리는 아이' 또한 못 보았습니다. 빗자루를 들고 골목 눈을 치우는 어린이만 하나 보았습니다. 아이 엄마와 아빠도 눈치우기에만 바쁘고, 아이하고 눈사람을 굴린다든지 눈놀이를 즐긴다든지 하는 모습을 찾아보지 못합니다.

언제든지 치울 수 있는 눈은 아닐 테지요. 더 쌓이기 앞서 치우고 사람들이 밟기 앞서 쓸어 놓으면 좋을 눈일 테지요. 그러나, 눈을 이렇게 쓸고 치우고 하면서 한켠에 눈사람 하나 굴려 놓는 마음씀을 보여주는 어른은 좀처럼 찾을 길이 없습니다. 네 시간 즈음, 인천시 중구에 깃든 내동, 송학동3가, 송학동2가, 송월동3가, 송월동1가, 북성동1가, 전동, 인현동, 인천시 동구 만석동, 화수1동, 화평동까지 열한 골목동네를 돌아보았지만, 눈놀이와 눈싸움은 하나도 없습니다. 낮밥을 먹고 다시금 열 군데 남짓 될 골목동네를 돌아보려 하지만, 이때에도 눈놀이 즐기는 어린이와 눈사람 굴리는 어른은 만날 길이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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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고향동무 살아가는 동네 한켠에 있는 나무전봇대를 스무 해 만에 알아보았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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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눈은 골목담에 얹힌 철조망도 따뜻하게 덮어 줍니다. ⓒ 최종규


그래도 저로서는 오늘 하루 보람이 있습니다. 눈길에서 나무전봇대 하나를 새로 만났습니다. 오랜 옛동무 살고 있는 만석동 9번지 골목길 한켠에 나무전봇대 하나 얌전히 서 있더군요. '어라, 네가 여기에 서 있었니? 이 길을 스무 해째 오가면서도 너를 여태 못 알아보고 있었는데. 어쩜 이렇게 눈 내리는 오늘 너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

그렇지만, 나무전봇대 사진 여러 장 찍고 돌아서는 길부터 쓸쓸합니다. 눈 치우기를 바지런히 하는 분들마다 '사진쟁이'를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뭐 하러 눈 사진을 찍어요?" "눈을 뭣하러 찍나?" 하는 핀잔을 자꾸자꾸 내쏩니다. '사진 찍는 사람은, 비 오면 비 사진 찍고 맑으면 해 사진 찍고 눈 오면 눈 사진 찍어야지요. 제 일인데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다가 빙그레 웃음만 짓습니다. 땀흘리며 애쓰는 분들 앞에서 제 등판에 흐르는 땀줄기를 손으로 슥 문질러서 내보일 까닭이란 없습니다. 아까부터 제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허옇게 뒤집어썼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니, 더는 내쏘는 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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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골목이든 큰길이든 어김없이 하얗게 덮는 눈발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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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도 소복하게 쌓이는 눈. ⓒ 최종규


그러고 보니 이 큰눈 쏟아지는 날에 사진기 들고 거리에 선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월요일이라 다들 일하러 갔을까요? 그러면 대학생은? 고등학교 사진반 아이들은? 지역에서 프로작가란 이름 내걸며 사진 찍는 분은? 지역에서 문화예술을 한다며 사진 찍는 분은? 워낙 눈이 드물어진 세상이라, 굳이 눈 사진을 담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지 궁금하지만, 저는 저대로 다리품 팔며 골목 사진을 찍지만, 그분들은 그분들 나름대로 어디에선가 눈을 사진으로 담고 있으리라 믿어 봅니다.

자동차가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염화칼슘을 뿌리고 찻길을 판판하게 다져 놓는 눈치우기를 바라봅니다. 어쩐지 가슴이 싸합니다. 펑펑 내리는 눈은 길막힘만 불러일으키고, 차곡차곡 쌓이는 흰눈은 볼꼴사나워서 얼른얼른 쓸어 없애고 녹여야 할 뿐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왠지 가슴이 허전합니다. 눈이 올 낌새가 보이면 엄마 몰래 장갑과 옷가지를 챙겨 놓고 있다가,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면 부리나케 옷 갈아입고 집을 뛰쳐나가 동네방네 돌며 동무들 이름을 소리소리 외치며 "아무개야, 눈 온다! 눈싸움하자!" 하고 다니던 어린 날이 떠오릅니다. 이때에도 어른들은 눈 치우기에만 바빴지만, 저나 또래나 위아래 형 누나 동생들은 눈놀이에만 마음을 팔았습니다. 골목놀이가 어느 결엔가 똑 끊어져 버렸다고는 하지만, 버스도 못 다니는 오늘 같은 날에 "아무개야 놀자!" 하는 외침소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학원을 쉬고 눈덩이를 휙휙 던지고 받는 모습을 그리기에는 너무 힘든 우리 살림살이인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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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북수북 내리는 눈으로 동네마다 '동네 눈싸움'을 벌여 볼 수도 있겠지요...... ⓒ 최종규


하얀 눈이 온누리를 하얗게 덮은 하루, 아예 회사일을 하루 쉬면서 온식구와 이불을 함께 뒤집어쓰고 도란도란 옛이야기를 나눈다거나 이불놀이를 즐길 수는 없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참에 며칠쯤 자동차는 쉬도록 내버려 두고 자동차 둘레에 쌓인 눈으로 눈사람을 굴려서 아파트이든 빌라이든 골목집이든 다세대주택이든 큰 건물 앞이든 눈사람 하나 덩그러미 꾸며 놓을 수는 없을까 하고 꿈꾸어 봅니다.

올 새해에는 눈싸움이 그저 옛날 옛적 이야기로만 남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예 덧없는 꿈으로 그치지 않으랴 싶습니다. 앞으로 오늘 같은 큰눈을 언제 또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마는.

올 새해에는 눈놀이가 그림책이나 동화나 만화에만 적히는 이야기로 읽고 그치는 지식에 머물지 않으면 좋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부질없는 생각이 되리라 싶습니다. 이 겨울에 몇 번쯤 더 오늘 같은 흰눈 선물을 하늘한테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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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

송월동1가에서 만석동으로 넘어가는 고가도로를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넘어가면서 꿈 같은 생각을 꿈처럼 품어 보았습니다. 인천을 떠나 서울로 가는 전철길도 눈에 깊이 파묻힌 오늘 하루인데, 아예 전철도 하루 쉬고 버스도 하루 쉬면서, 눈치우기도 나중에 하기로 하고 온식구가 오순도순 모이는 한편, 이웃 식구하고도 살가이 모이고, 가까운 동무를 불러 느긋하게 이야기꽃 피우면서 밥 한 그릇 나누는 날로 보내면 어떠할까 하고. 하늘이 우리 모두 좀더 넉넉하게 말미를 마련해서 따순 사랑을 열고 너른 믿음을 나누어 보라는 선물로 큰눈을 받아들이면 어떨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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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하얗게 덮인 날, 하얀 누리를 있는 그대로 하루쯤 놓아 두면서 우리 몸과 마음을 두루 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을 꾸어 봅니다.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골목길 #인천골목길 #눈길 #큰눈 #골목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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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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