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고·과학고 아니면 인권조례는 시기상조?

[取중眞담]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등록 2010.01.27 11:09수정 2010.01.2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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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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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경기 수원시 경기도교육청에서 열린 '2010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종합 공청회'에 참석한 학생과 학부모들이 조례 제정 취지에 대한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 유성호


"저는 학생 시절 천부인권사상을 주장한 철학자의 이름을 대답하지 못해 선생님에게 맞았습니다. 이게 우리 인권교육의 현실입니다. 어쩌면 이제 우리는 학생인권조례에서 체벌 금지 조항이 몇 조 몇 항에 있는지 묻고, 모르는 학생들을 때릴 수도 있습니다."

24년 경력의 한 교사가 지난 19일 경기도교육청에서 열린 경기도학생인권조례 공청회에서 한 말이다. 천부인권을 주장한 철학자를 모른다고 체벌을 가하는 학교. 이것만큼 한국의 학교와 학생 인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아주 오래된 옛날 사례가 아니다. 지금도 "치가 떨리는 교사들의 폭력은"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의정부고등학교에 다니는 하진우 학생은 25일 의정부 제2도교육청에서 열린 경기도학생인권조례 3차 공청회에서 이런 경험담을 들려줬다.

"청소를 하다가 덤벙대서 한 곳을 빠뜨렸다. 그랬더니 평소 잘 알고 지낸 선생님이 내게 '왔다'. 손가락으로 먼지를 스~윽 닦더니 내게 '하진우 혀 내밀어' 그러시더라. 깜짝 놀랐다. 이런 것도 교권인가?"

하진우 학생은 "교권은 가르치는 권리를 뜻하는 것이지, 학생들을 마음대로 체벌하고 구타하는 권리가 아니다"며 "교권과 학생 인권은 상하가 아닌 동등한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천부인권설 주장한 철학자 모른다고 구타하는 교실

25일 행사를 마지막으로 경기도학생인권조례제정자문위원회(위원장 곽노현 교수) 주관으로 총 세 차례 진행된 공청회가 모두 끝났다. 공청회마다 학생, 학부모, 교사 등 약 70~80여 명의 청중이 참석했다. 토론자로 나선 사람도 20명이 넘는다.


인권조례자문위원회는 공청회에서 나온 견해와 사회 각계의 다양한 의견을 바탕으로 경기도학생인권조례를 최종 확정해 오는 2월 초에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에게 보고할 방침이다. 경기도교육청은 최종 안을 갖고 내부 토론을 거친 뒤 도교육위원회와 도의회에 올린다는 계획이다.

학생인권조례의 최종안이 어떤 형태로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도교육위와 도의회를 거치면서 다시 한 번 뜨거운 논란이 될 것은 자명해 보인다. 최악의 경우, 무상급식에 이어 도교육청과 도의회의 대립이 재현될 가능성도 충분하다.

결국 처음 예상과 달리 '학생인권조례 2010년 신학기 일선 학교 적용'은 어려워 보인다. 사회적 토론과 합의는 차치하더라도, 도교육청 내부 토론-도교육위-도의회로 이어지는 논의 과정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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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경기 수원시 경기도교육청에서 열린 '2010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종합 공청회'에서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유성호

도교육청은 늦어도 2010년 상반기에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2010년 상반기는 김 교육감의 임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이자, 교육감 선거를 포함한 지방선거가 열리는 때다. 만약 김 교육감이 재선에 도전해 성공한다면 학생인권조례는 날개를 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반대로 김 교육감이 낙마하는 상황이 오면 학생인권조례의 운명도 장담할 수가 없다. 상황이 이러니 도교육위나 도의회는 벌써 '뜨거운 감자'가 된 학생인권조례 논의와 처리를 차일피일 미룰 가능성이 크다.

결국 천부인권을 밑바탕에 둔 학생인권조례마저 치밀한 정치적 계산에 의해 그 운명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경기도교육청은 "무상급식과 마찬가지로 학생인권조례 역시 정치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며 조속한 논의와 처리를 바라고 있다.

세 차례 열린 공청회를 돌아보면 학생인권조례에 찬성하며 조속한 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은 편이었다. 특히 학생들은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논리와 근거로" 인권조례를 조속히 제정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보수우익 진영의 반대 목소리도 꽤 나왔다.

이제 도교육위와 도의회로... 학생인권조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특히 여러 현장 교사들은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 학생을 지도할 수 없고, 교권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추락한다"고 우려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벽제중학교 학생부장이라고 밝힌 교사는 25일 의정부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위의 하진우 학생 발언을 문제 삼으며 이런 논리를 펼쳤다.

"하진우 학생은 '선생님이 오셨다'가 아닌 '왔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학교에서 교권이 추락했다. 우리 학교에는 한 반에 40명이 넘는 교실이 있다. 사실 20명이 넘으면 아이들을 인권적으로 돌봐줄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 엄청난 혼란이 온다."

또 이날 토론자로 나선 최선도 한국교원노조 경기본부장은 "학생인권조례는 대학생에게나 이상적인 조례"라며 "물론 명문고, 외고, 과학고엔 학생인권조례를 던져놔도 큰 문제가 없지만, 그 이외의 일반 학교에 던져 놓으면 큰일 난다"고 말했다.

즉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몰리는 이른바 '명문고', 외고, 과학고 외의 다른 학교에서 학생인권조례는 시기상조라는 뜻이다. 이 발언은 명예훼손이나 인권 침해 등의 소지가 있다.

이 발언을 들은 한 학생은 "교사가 저런 식으로 인권 침해 발언을 하고 일반고 학생을 무시하기 때문에 더더욱 학생인권조례가 조속히 제정돼야 한다"며 "명문고, 외고, 과학고 학생들만 인간이고 다른 학생들은 인간도 아니냐"고 불쾌감을 나타냈다.

"인권조례, 외고·과학고 이외 학교에 던져 놓으면 큰일 난다"

강순원 한신대 교수는 "한 교실 학생수가 40명이어서 인권적으로 대하지 못하겠다면 도대체 언제까지 인권을 유보하겠다는 것이냐"며 "인권은 학생 숫자를 갖고 흥정하거나 조절하는 게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송병춘 변호사 역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 교권이 추락할 것이란 우려는 심각한 오해"라며 "대통령 권한이 남용될 수 있듯 교권도 남용될 수 있는 것이다, 교권은 학생들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양쪽의 견해는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한국 사회는 이제야 겨우 학생 인권을 공론화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경기도학생인권조례는 지금 외줄 위에 서 있다. 천부인권을 주장한 철학자를 모른다고 학생을 구타하는 교실이 계속 이어질까, 아니면 학생들에게도 존중받을 인권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2010년 이 땅에서 꽃피게 될까?

새삼스럽게 포털사이트를 이용해 '천부인권설'을 검색해 봤다. 이렇게 나왔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늘이 준 자연의 권리, 곧 자유롭고 평등하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학설. 홉스나 로크와 같은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주장하여 미국의 독립 선언이나 프랑스 인권 선언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수백 년 전, 그러니까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주장한 내용을, 한국 사회는 지금 논의하고 있다. 올해는 2010년이다. 
#학생인권조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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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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