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선수에 눈물 흘린 정형돈·길...역시 <무한도전>

[TV리뷰] 진부한 애국코드와 선악구도 타파한 <무한도전>

등록 2010.01.31 14:15수정 2010.01.3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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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A 페더급 여자 세계 챔피언 최현미(좌)와 타이틀 도전자 텐코 츠바사(우). ⓒ MBC 화면캡쳐


지난해 이맘 때, <무한도전> 멤버들은 일본 나가노에 가서 봅슬레이를 탔다. 노홍철이 보여준 영화 <쿨러닝>을 다함께 본 그들은 그렇게 노홍철의 꾐(?)에 빠져 비탈길에서 달구지를 타는 것을 시작으로 봅슬레이의 세계에 입문했다.

<무한도전> 멤버들이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리는 나가노에 가서 놀란 건 봅슬레이의 엄청난 속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동계스포츠 강국인 일본의 봅슬레이 인프라를 보며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이 단 2대밖에 갖고 있지 않은 봅슬레이를 일본은 대학별로, 각 팀마다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안 멤버들은 비교조차 하기 어려운 규모의 열세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가대표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8~2009 봅슬레이 월드컵에서 15위를 기록, 17위를 기록한 일본을 제치고 출전권을 획득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봅슬레이 국가대표팀. 그리고 <무한도전>은 그들을 위한 후원을 시작했다. 티셔츠를 팔아 그 수익금을 봅슬레이에 후원하기로 한 것. 비인기 스포츠에 대한 <무한도전>만의 조용한 격려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이번에는 권투였다. 1970~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국민스포츠 권투. 전 세계 챔피언 박종팔의 말에 의하면 "동양 타이틀전만 해도 도로가 한산해질 정도"였던 권투는, 그러나 이젠 인기가 시들해져 세계 타이틀전 스폰서도 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WBA 페더급 여자 세계 챔피언 최현미. 19살 소녀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WBA 세계 챔피언이었다.

시들해진 권투 인기, 안타까운 최현미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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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방어전에 성공해서 걱정없이 권투를 하는 게 소망이라는 최현미. ⓒ MBC 화면캡쳐


꿈에 그리던 세계 챔피언까지 됐지만 아직까지 파이트머니를 받아본 적 없는 그녀의 열악한 처지. 게다가 1차 방어전을 치르고 6개월 안에 2차 방어전을 치르지 못하면 챔피언 타이틀이 박탈되는 상황에서 그녀는 2차 방어진 시한을 겨우 2개월 남겨두고도 스폰서가 없어 방어전 상대조차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개그우먼 김미화를 통해 그녀의 딱한 처지를 들은 <무한도전> 멤버들은 권투소녀 최현미를 도우러 나섰다. 그들이 만난 최현미는 세계 챔피언이라는 타이틀과 놀라운 권투 실력을 빼면 또래 친구들과 다를 것 없는 밝고 명랑한 소녀였다. 한 점 구김살 없이 쾌활하게 웃는 그녀가 가진 단 한 가지 소망, 그것은 꼭 2차 방어전을 치러 계속 권투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잡힌 2차 방어전. 상대 선수는 일본에서 촉망받는 일본 랭킹 1위의 텐코 츠바사였다. 방어전 날짜가 잡히기도 전에 이미 스폰서가 붙어 자본력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경기 준비에 들어갔다는 정보가 정형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시청자들은 이 각본 없는 드라마의 밑그림을 어느 정도 완성시키기에 이른다.

종목을 불문하고 한국인의 애국심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한일전. 한쪽은 탈북자 출신으로 세계 챔피언이 됐지만 스폰서가 없어 방어전 상대조차 구하지 못했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 그에 반해 다른 한쪽은 방어전 날짜가 잡히기도 전에 스폰서가 붙어 체계적인 연습을 하고 있는 상황. 가진 것 없는 주인공이 모든 걸 가진 적과 싸워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드라마의 공식, 빤한 선악구도.


진부한 선악구도 타파한 <무한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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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드러내 감동을 준 츠바사. ⓒ MBC 화면캡쳐


그러나 모두가 이렇게 예상하고 다음 장면을 기다릴 때, <무한도전>은 그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준하와 정형돈을 일본으로 급파해 츠바사 선수를 만나게 했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져 버린 밑그림. 실제로 본 츠바사 선수는 모두가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무한도전> 멤버들을 맞이했다.

작은 연립주택의 1층을 개조해 만든 작은 체육관. 간판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정형돈에게 츠바사가 가리킨 것은 문에 붙어 있는 작은 아크릴 간판이었다. 도저히 그 안에 체육관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준하와 정형돈은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체육관 구석에 놓인 아주 작은 사각의 링을 보고나서야 그곳이 체육관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가 정말 체육관이 맞나요?", "체육관이 하나 더 있죠?"라고 묻는 정준하와 정형돈의 질문에 "기계나 설비가 좋은 곳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강한 선수가 나오는 건 아니죠"라고 담담하게 대답하는 츠바사의 모습에서, 우리 편 최현미와 대립되는 거대한 적, 쓰러트려야 할 악의 이미지로 그려졌던 그녀의 이미지는 산산조각났다.

거대 스폰서도 없고, 상대방에 대한 체계적인 전력 분석도 안 되어 있는 상황. 열악하기로는 최현미와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또한 권투를 좋아하고, 자신이 권투하는 모습을 통해 보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전해 줬으면 좋겠다는 모습에서 비춰지는 그녀의 권투를 향한 순수한 열정은 권투를 계속하는 게 유일한 소망이라던 최현미와 겹쳐졌다.

모두가 승자였던 경기를 보여준 <무한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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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은 최현미와 츠바사를 동등한 시각에서 비추며 기존의 선악구도를 타파했다. ⓒ MBC 화면캡쳐


한일전의 애국 코드, 빤한 선악구도를 벗어던진 <무한도전>은 그 때부터 철저하게 두 선수를 동등한 시각에서 비추기 시작한다. 네 편과 내 편을 가르지 않고, 최현미를 응원하는만큼 츠바사를 응원했다. 정준하와 정형돈은 츠바사가 입국하는 공항에 마중 나가 그녀의 컨디션 조절과 연습상태를 체크하며 도왔고, 경기장에서도 그녀를 향한 응원의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맞붙은 최현미와 츠바사. 치열하게 서로를 향해 주먹을 뿌리는 그녀들의 사투. 10라운드 끝까지 이어진 승부의 결말을 <무한도전>은 보여주지 않았다. 승자와 패자로 나뉘고 그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스포츠 세계의 냉혹한 진리를 거절한 <무한도전>은 마지막 라운드의 끝을 알리는 공이 울리고 두 선수가 서로 포옹하는 장면에서 '모두가 승자였던 경기'라는 자막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시합이 끝난 후 승자와 패자의 희비가 엇갈리는 모습을 조명하고 부각시켰다면, 눈이 퉁퉁 부은 츠바사를 보며 정형돈과 길이 흘린 눈물의 감동은, 최선을 다해 고맙다고 말하는 정준하의 말의 의미는 퇴색되었을지도 모른다. <무한도전>은 기존의 방식을 또 한 차례 과감히 버리면서 자칫 틀에 박힌 채로 흘러갈 수 있었던 이야기를 멋지게 그려냈다. <무한도전>이 '예능을 넘어서는 예능'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한도전 #권투 #최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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