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버린 우리 말투 찾기 (38) 그녀 10

[우리 말에 마음쓰기 858] '그녀 → 시앵', '그녀 → 간호사'

등록 2010.02.13 16:06수정 2010.02.1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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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그녀 → 시앵 / 아기 엄마

 

.. 나는 시앵의 어머니와 아이와 함께 갔어 … 테오, 나는 그곳에서 그녀를 보고 정말 행복했어. 그녀는 햇빛과 녹색으로 가득한 정원이 보이는 창 옆에 누워서, 너무나 지쳐 졸고 있었어 ..  <빈센트 반 고흐/박홍규 옮김-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아트북스,2009) 227쪽

 

"시앵의 어머니"는 "시앵 어머니"나 "시앵네 어머니"로 다듬고, "정말(正-) 행복(幸福)했어"는 "참으로 즐거웠어"나 "더없이 좋았어"나 "아주 기뻤어"로 다듬습니다. '녹색(綠色)'은 '풀빛'이나 '푸름'으로 손보고, '정원(庭園)'은 '앞뜰'이나 '뜰'이나 '꽃밭'으로 손봅니다. '뜨락'이라는 낱말도 있고 '텃밭'이나 '예쁜 뜰'이나 '앙증맞은 꽃밭'이라 해 볼 수 있습니다.

 

 ┌ 그곳에서 그녀를 보고 (x)

 └ 그곳에서 시앵을 보고 (o)

 

나라밖, 이 가운데 서양에서 나온 책을 우리 말로 옮기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정원'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 보기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한테는 '정원'이 아니라 '마당'이나 '꽃밭'이나 '뜰'이건만, 하나같이 '정원'만을 이야기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일본사람들은 '庭園'을 가꾼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본은 '庭園' 문화가 발돋움해 있습니다. 제법 넓게 마련한 집 안쪽에 '너른 자연을 옮겨다 놓은 듯하'게 꾸며 놓는 문화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돈없고 힘없는 사람이야 이렇게 가꿀 형편이 못 됩니다만, 아무튼.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영어를 배우던 때를 떠올립니다. 그무렵, 영어 'garden'은 반드시 '정원'으로 풀어서 이야기하도록 배웠습니다. 다른 동무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정원'은 우리가 쓰던 낱말이 아니었고, 우리한테는 너무 낯선 곳이었기에 제 입에는 잘 달라붙지 않았습니다. 다만, 영어 교과서에서 다루는 '가든 = 정원'은 서양집 앞에 꾸며 놓은 작은 풀숲이나 잔디밭 같은 데를 가리켰다고 느꼈습니다. 영어를 배우며 만나는 '가든'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정원'으로 풀이했고, 이리하여 '서양집에서 꾸미듯 마련한 풀숲이나 잔디밭'이라면 '정원'이라고 해야 하는 줄 알았으며, 일본사람 집 안쪽에 꾸민 모습도 '정원'이라고 해야 맞는 줄 알았습니다.

 

 ┌ 그녀는 창 옆에 누워서

 │

 │→ 시앵은 창 옆에 누워서

 │→ 사랑스런 시앵은 창 옆에 누워서

 │→ 아기 엄마는 창 옆에 누워서

 │→ 애 엄마는 창 옆에 누워서

 └ …

 

중학교에 들어간 처남이 배우는 영어 교재를 슬쩍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beach'는 '해변'으로 풀고, 'shore'는 '바닷가'로 풀어 놓습니다. 처남은 이렇게 적힌 대로 외우고 있는데, '해변'이 무엇이고 '바닷가'가 무엇인지를 그리 깊이 따지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해변(海邊)'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다름아닌 '바닷가'를 한자로 옮긴 낱말일 뿐입니다. '바다 海 + 가장자리 邊'입니다. 우리 말은 '바닷가'이고, 한자말은 '해변'입니다. 아니, 한국사람 낱말은 '바닷가'이고,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 낱말은 '해변'입니다.

 

영어사전을 뒤적이면, 'beach'이든 'shore'이든 '해변, 해안, 바닷가, ……'처럼 풀이해 놓습니다. 그나마 한 자리에 죽 모아 놓기는 합니다만, 이런 말풀이가 우리네 아이들한테 말을 말답게 가르치는 슬기로운 말모이, 또는 낱말책 구실을 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my = 나의'라고만 뜻풀이를 달아 놓듯, 'she = 그녀'라고만 뜻풀이를 달아 놓으면서, 이 나라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그녀'라는 말투에 길들고 눈익고 버릇들도록 이끌지 않느냐 싶어 걱정스럽습니다.

 

서양말에서는 대이름씨를 꼼꼼히 나누어 쓴다지만, 우리는 대이름씨를 꼼꼼히 나누어 쓰지 않습니다. 일본사람은 저희 좋을 대로 '被女'라는 새말을 빚어내어 썼다지만, 우리가 '피녀'를 껍데기만 한글인 '그녀'로 옮겨서 받아들일 만한지 궁금합니다. 더욱이, 서양책을 우리 말로 옮길 때면, 언제나 '그녀'가 수십 수백 번이나 튀어나오도록 하는데, 이렇게 옮겨적는 일을 참다운 번역이라 할 만한지, 이런 번역이 우리 삶과 생각과 앎을 알뜰히 보듬거나 북돋울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우리 말이 아닌 엉뚱한 말투로 번역을 하고 우리 말을 가르치고 우리 이웃을 만나고 있지 않은가 모르겠습니다.

 

 

ㄴ. 그녀 → 간호사

 

.. 나는 한 간호사에게 반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녀가 입고 있던 하얀 가운이 기억에 선명하다 ..  <유모토 가즈미/양억관 옮김-고마워, 엄마>(푸른숲,2009) 120쪽

 

"하얀 가운(gown)" 같은 말은 그대로 두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얀 옷"이라고만 해도 넉넉하지 않으랴 싶고, "하얀 덧옷"이나 "하얀 웃옷"이나 "하얀 치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간호사옷'이라 하든 '의사옷'이라 하든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맡은 일에 따라 입는 옷이 다르다면 어떠한 일을 맡으면서 어떤 옷을 입는가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 주면 됩니다.

 

"기억(記憶)에 선명(記憶)하다" 또한 그대로 두어도 됩니다. 그렇지만 "머리에 남아 있다"나 "환하게 떠오른다"나 "또렷이 생각난다"처럼 다듬을 수 있습니다. 그대로 두는 일이 나쁘지 않고, 다듬는 일 또한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글을 어떻게 갈무리하고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추스르고자 하는지를 찬찬히 헤아려 주면 좋습니다.

 

 ┌ 한 간호사 (o)

 └ 그녀가 입고 있던 하얀 가운 (x)

 

그나저나 이 보기글을 우리 말로 옮긴 분은 처음에는 '간호사'라 옮기고, 다음에는 '그녀'라 옮깁니다. 이 보기글은 어린이문학에 나옵니다. 옮긴이는 아이들이 보는 책을 일본말에서 한국말로 옮기면서 '그녀'라는 낱말을 아무렇지 않게 끼워넣었습니다.

 

창작 시를 쓰거나 창작 동화를 쓰는 어른들은 거의 모두 '그녀'라는 말마디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몹시 애를 씁니다. 창작 시와 동화를 펴내는 출판사 편집자들도 글쓴이가 보내 온 글에 '그녀'라는 말마디가 있으면 덜어내려고 눈을 밝힙니다. 그런데 나라밖 작품에서는 '그녀'가 흔히 튀어나옵니다. 요즈음에는 웬만한 어린이문학에도 '그녀'가 손쉽게 드러납니다. 낮은학년 아이들이 보는 어린이문학에서는 '그녀'가 거의 없으나, 높은학년 아이들이 보는 어린이문학에서는 곧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난날 교과서를 엿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만, 초등학교에서는 '그녀'라는 말마디를 안 썼고, 요즈음도 웬만해서는 이 말마디를 쓰지 않도록 힘을 쏟습니다. 그렇지만 교사들은 이러한 말씀씀이를 잘 헤아리지 못합니다. 생각없이 툭툭 내뱉고 생각있다면서 톡톡 내쏩니다.

 

아이들은 저희 엄마 아빠랑 텔레비전을 함께 보는데, 아이들도 함께 보는 연속극이나 다른 방송을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그녀'라는 말마디가 가득합니다. 어린이책과 교과서에서 '그녀'가 나타나지 않도록 아무리 애써 본들, 교사들이 말씀씀이를 제대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방송을 엮고 신문을 내는 사람들이 글씀씀이를 옳게 가누지 않습니다.

 

여자아이가 여자 간호사를 바라보면서 생각하는 자리이니, 이때에는 "그 언니"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아마, 아이들 말투를 헤아린다면 "그 언니가 입고 있던 옷"이라는 말마디가 가장 잘 어울리지 않으랴 싶습니다.

 

 ┌ 간호사가 입고 있던 하얀 옷

 ├ 그 사람이 입고 있던 하얀 덧옷

 ├ 그 언니가 입고 있던 하얀 웃옷

 ├ 그분이 입고 있던 하얀 치마

 └ …

 

어린이문학이요 어린이책이요 동화임을 떠나, 아이들 말씀씀이를 살피고 아이들 눈높이를 돌아볼 노릇입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어른들 때문에 잘못 물들거나 찌드는 말투가 어떠한가를 헤아릴 노릇입니다. 아이들이 즐겁게 쓸 말투를 튼튼히 세워 놓으면서, 우리 어른들이 엉터리로 마구 내뱉는 말투가 끼어들지 않도록 알차게 가꿀 노릇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2.13 16:06 ⓒ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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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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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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