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의 '삶의 질'이 수능 한방으로 결정된다?

한 제자가 '새터' 때 교육받은 생활지도규정 이야기

등록 2010.02.28 14:45수정 2010.02.28 21:00
0
원고료로 응원

서울대학교 정문 ⓒ 권우성

서울대학교 정문 ⓒ 권우성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에게 명문대는 '우상'이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 때문에 일찌감치 특목고 진학을 포기한 제자 준수(가명). 그러나 중학교 때 최상위권이었기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서도 열심히만 공부하면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다.

 

공부방 벽에 큼지막하게 '하면 된다'는 글귀를 써서 붙였고, 이른바 SKY 대학의 교문 사진과 교표를 책상과 침대의 머리맡 곳곳에 걸어 두었단다. 소녀시대와 카라가 출연하는 TV 쇼 프로그램은 안 봐도, EBS의 <공부의 왕도> <공부의 달인> 같은 건 녹화를 해서라도 반드시 챙겨본다고 한다. 그들을 따라 실천을 할 수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보는 것만으로도 큰 자극이 된다고 한다.

 

2월말부터 고등학교마다 새내기들을 위한 새터(오리엔테이션)가 한창이고, 3월의 시작과 함께 입학식이 예정돼 있다. 고등학교 입학식은 대학 입시를 위한 출정식과 다름 아니다. 학교장과 선배의 환영사에서 '3년의 학창시절동안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라'는 식의 이야기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오로지 수능 대박과 명문대 합격을 위해 새내기 때부터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강변뿐이다.

 

수능에 방해되는 모든 것이 금지돼는 '고등학교'

 

지난 겨울방학 동안 고등학교 영어, 수학 과정을 학원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녔지만, 준수의 표정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주변 친구들의 일과와 비교하고, 부모님의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다보니 왠지 학습량과 시간이 늘 부족하게 느껴지는, 누구나 갖게 되는 그런 불안감 때문이다. 그런데, 새터를 통해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말씀을 듣고, 생활지도규정을 받아드니 정신이 번쩍 들더란다. 불안감을 훨씬 뛰어넘는 두려움, 말 그대로 공포였다고 한다.

 

과연 그는 고등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무슨 얘기를 들었고, 생활지도규정엔 무엇이 적혀 있었던 걸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을 때부터 일찍 등교해야 하는 것, 배워야 할 과목도 많고 보충수업이다 뭐다 해서 수업시간이 많이 는다는 것, 그리고 밤늦은 시간까지 '야자'를 해야 한다는 것쯤은 각오했던 바다. 아울러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빽빽한 일과를 버텨내려면 체력이 무엇보다도 요구된다는 점 또한 그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일제고사처럼 중요한 시험을 앞둔 주말에는 때때로 등교해야 한다는 것과 여름이고 겨울이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상 3년 동안 방학이란 없다는 것도, 방학 선언은 하지만, 그것은 방학 중 보충수업의 시작을 의미할 뿐이라는 점은 중학교 때도 겪어본 바다. 그나마 숨통 트일 구석이 있다면 시내버스 끊길 시간까지 해야 하는 '야자'가 없다는 것, 곧 저녁식사는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정도?

 

그러나 명문대 합격은커녕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조차 그 정도의 각오로는 어림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수능 공부에 방해가 되는 그 어떤 것도 3년간 일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거다. 이는 기실 우리나라 인문계 고등학교의 '공통된' 생활지도규정이다. 그것은 기성세대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수능 공부에 방해가 될 것으로 '판단되는' 모든 것들이 금지된다고 보면 된다.

 

수능 공부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공공의 적?

 

a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지난해 11월12일 오전 종로구 풍문여고 고사장 모습. ⓒ 권우성

201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지난해 11월12일 오전 종로구 풍문여고 고사장 모습. ⓒ 권우성

그 안을 살짝 들여다보자. 단연 첫 번째는 두발 제한 규정이다. 언제부턴가 학생들에게는 인권의 상징이 된 두발 제한 규정은 정작 학부모와 교사들에게는 학생 생활지도를 위해 양보할 수 없는 보루가 되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지루한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외모에 관심이 많은 나이다보니 다른 것들보다 민감한 게 사실이지만, 그와 함께 생활지도규정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들을 보면 시대착오적인 것들이 적지 않다.

 

물론, 그 모든 금지 규정들이 가혹하고 퇴행적이기까지 하다는 건 학부모도, 교사도 대체로 인정한다. 다만 '명문대 합격'을 위해서라면 용인될 수 있고, 나아가 필요하다고 믿는 것이다. 고등학교 3년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평생 삶의 질이 결정된다는 기성세대의 경험과 현실인식을 쉬지 않고 강조하다보니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은 물론, 초등학생과 유치원생들조차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 사회의 불문율이 되었다.

 

수능 공부를 방해하는 '공공의 적' 2호로 지목된 건 단연 휴대전화다. 휴대전화 소지를 일체 금지한다는 거다. 학교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적발될 경우, 압수해 보관하고 대개 학년이 마무리된 후 되돌려주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 휴대전화 사용 인구 4천만 대 시대, 나아가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손안의 컴퓨터라는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보편화되는 시대지만 생활지도규정은 아이들에게 3년 동안 기술 문맹으로 살아가라고 권장하는 꼴이다.

 

그렇지만 항의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새내기들 앞에서 교사가 생활지도규정을 선언하듯 발표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휴대전화 소지 자체를 막는 것보다 공공장소에서의 사용 예절을 가르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교육적이지 않느냐고 건의해봐야 소용없다. 그런 건 대학에 가서 배우라는 투다. 명문대 합격이라는 '사명' 앞에 교육적 운운하는 건 한가하고 배부른 소리로 치부된다.

 

개개인의 생체리듬조차 획일화시키는 고교 3년

 

MP3, PMP도 소지해서는 안 된다고 적시되기 일쑤다. 하긴 스마트폰이 빠른 속도로 보편화돼 MP3와 PMP 등 전자기기가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었지만, 어쨌든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학교에서는 전자기기를 통해 보고 듣는 교육용 콘텐츠를 활용할 수 없도록 만든 셈이다. 정부는 교육방송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여 적극 활용하게 함으로써 사교육을 대체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정작 일선 고등학교의 분위기는 영 딴판이다.

 

기실 '공부는 안 하고 음악만 듣는다'는 이유로 MP3를 금지하는 것부터가 황당하다. 결국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 음악 감상이라고 대답할지언정, 음악 또한 명문대 합격을 위해 잠시 접어두어야 하는 사치로 규정돼버렸다. 하물며 컴퓨터 게임 같은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심지어 전자사전조차 수능 공부 방해 물품으로 지목한 학교도 더러 있다. 이 이유 또한 '명료'하다. 공부를 편하게 하면 쉽게 잊힌다는 기성세대의 경험과 어휘 찾기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 십상이라는 게 이유다. 손때 묻은 두툼한 사전을 뒤적여가며 공부하는 게 명문대 합격의 비결이라는 조언과 함께.

 

물론, 그렇게 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아주 쉽게 일반화되고 생활지도규정으로 만들어진다. 물론 새내기들에게는 반드시 따라야 할 '법'일 뿐 자신의 공부 스타일을 고집하고 선택할 여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명문대 합격이라는 '사명' 앞에 3년간의 고등학교 생활은 공부하는 방식은 물론 개개인의 생체 리듬조차 획일화시킨다.

 

도대체 명문대가 뭐기에... 이렇게까지 해야할까

 

준수가 새터 때 메모해 왔다는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어록'을 보노라니, '도대체 명문대가 뭐길래…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소심한 그가 고등학교 3년이라는 긴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고, 명문대 합격을 되뇌며 '섬기는' 그가 엽기적이기까지 한 선생님들의 조언을 혹여 아무렇지도 않게 내면화시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들었다.

 

"누구나 인생의 1/4(태어나서 19세까지)은 수능을 위해 살아온 삶이다."

"평생 삶의 질은 수능 한방으로 결정된다."

"국적은 바꿔도 학적은 못 바꾼다."

"명문대 합격을 위해서 '친구'는 잊어라, 오로지 '경쟁자'만 있을 뿐이다."

"교육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묻지 마라. 명문대 합격이라는 결과는 모든 과정과 수단을 일거에 덮어버린다."

 

미래세대인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에서조차 가치관의 전도를 부추기는 현실 앞에서 학부모, 교사를 비롯한 이 땅의 기성세대들에게 진정 묻고 싶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생활지도규정 #명문대 #수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고장난 우산 버리는 방법 아시나요?
  2. 2 마을회관에 나타난 뱀, 그때 들어온 집배원이 한 의외의 대처
  3. 3 삼성 유튜브에 올라온 화제의 영상... 한국은 큰일 났다
  4. 4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현상들... 서울도 예외 아니다
  5. 5 "청산가리 6200배 독극물""한화진 환경부장관은 확신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