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 그라이브 포로 학대 사진
이 사진이 폭로된 뒤 '아부 그라이브'라는 이름은 '미국의 수치'가 되어버렸다. 네오콘으로 이라크 전쟁을 진두지휘한 강경 매파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까지 자신의 임기 5년 중 이 사건을 보고 받은 날이 '최악의 날'이었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 이 사건의 추악성을 알 수 있다.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는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의 집권기에는 정적(政敵)에 대한 고문 장소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그 다음 사건은 국제법률가들 사이에 '국제법이 실종된 블랙홀'로 불리어진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벌어진 인권 실종사태다. 테러 혐의로 붙잡혀 온 수감자들은 수년 이상 재판도 받지 않고, 변호사의 접근도 금지된 상태에서 혹독한 수감 생활을 해야 했다.
아프칸과 파키스탄 등에서 잡혀온 알 카에다와 탈레반 관련 테러 피의자들이 이곳으로 이송되어 감금된 것은 2002년 1월 초다. 당시 미국 국방부는 이들이 관타나모 수용소에 도착하는 장면을 사진 찍어 언론에 공개했는데, 쇠줄로 손발을 꽁꽁 묶은 채 무릎을 꿇게 하는 장면이 담긴 이 사진은 이슬람 세계에 반미 감정을 격화시키는 촉발제가 되었다.
관타나모 수용소는 그 뒤에도 계속하여 인권 침해 지적을 받았고, 미국이 제네바 협정에 따른 정당한 포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는 비난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된 상황에서 이들은 '전쟁 포로'가 아니라 '테러 용의자'라며 그러한 비난을 철저히 무시했다. 관타나모 수용소의 인권침해 문제는 2008년 미국 대선 때도 쟁점이 되었으며,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는 자신이 당선되면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와 관타나모 수용소는 부시 임기 동안 인권 침해 논란의 핵심이었고, 또한 이슬람 세계에서 반미 감정을 격화시키는 촉발제가 되었다. 그러나 부시를 비롯한 네오콘의 오만과 일방주의는 이슬람 세계의 그러한 저항을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그들의 길을 계속 갔다.
국가위기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면 결국 망한다9.11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 부시의 핵심 전략가인 칼 로브는 공화당 전국위원회 모임에 가서, 민주당은 미국을 안전하게 지킬 수 없는 정당이라고 비판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철저하게 당파적 쟁점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칼 로브는 비열할 정도로 상대를 헐뜯는 전형적인 싸움닭 전략가다. 2000년 공화당 경선 때 존 매케인 후보가 뉴 햄프셔 예비선거에서 예상밖 승리를 하여 기세를 올리자 칼 로브는 그 다음 예비선거 과정에서 매케인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을 무섭게 가했다. 하도 인신공격과 비방이 심하자 매케인 후보는 "도대체 저들의 인신공격의 끝은 어딘가"라고 반문하기까지 했다.
인신공격과 분열적 공작 정치의 달인인 칼 로브는 조지 부시의 정치적 스승이다. 적과 동지를 분명하게 나눠서 치열한 이념 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칼 로브는 한국 정치판에서 보면 걸핏하면 '좌파'로 모는 마녀사냥 전략과도 맥이 닿아 있는 인물이다. 하긴 한국의 수구 기득권 세력이 어디에서 공작 정치를 배워오겠는가.
칼 로브의 분열적 공작 정치는 조지 부시의 대통령 당선에 핵심적 공헌을 했다. 특히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 광기에 휩싸일 때,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네오콘 강경매파들과 함께 핵심 역할을 했다. 조지 부시를 우두머리로 그 아래 포진한 이들 캠프에는 미국과 미국에 동조하지 않는 세계를 '선과 악'으로 나누고, 기독교와 이교도로 이분법으로 나누고, '악의 세력'을 쳐부수기 위해 거짓말 하는 것도, 인권 따위 무시하는 것도 아무 것 아닌 그런 독선, 오만, 일방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칼 로브가 공화당 지도부에 밝힌, '테러와의 전쟁'을 정치화하겠다는 의도는 그 뒤 착실하게 구체화되었다. 부시의 지지율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테러 경보'를 알리는 텔레비전 광고가 쏟아졌다.
2003년 3월, 미군의 이라크 침공이 이뤄지기 전, 이미 미국 국민들의 다수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2002년 초, 딕 체니 부통령은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공언했고, 2002년 새해 연두교서 발표 때 조지 부시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이 아프리카로부터 대량의 농축 우라늄을 획득하려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비롯한 부시 행정부의 수뇌부는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에 적극적"이라고 의회에 브리핑했다. 거짓이었다. 이라크 침공은 그렇게 거짓에서 출발했다. 유엔 사찰단이 임무를 모두 완성할 때까지만 기다려 보자는 의견도 묵살되었다.
마침내 미군의 대대적인 이라크 침공이 2003년 3월 21일 시작되었다. 미군의 무시무시한 군사 공격이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해 5월 1일 조지 부시 대통령은 걸프 해역에 있던 에이브러햄 링컨 항공모함에 올라가 '임무 완수'라는 대형 펼침막을 뒤로 한 채 "미국의 군사작전은 완수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때 부시는 70%가 넘는 지지율을 즐겼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 그의 지지율은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임무가 완수되었다던 이라크 침공은 그 뒤 이라크 내전으로 치달으면서 이라크 시민들뿐 아니라 미군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되었고, 이라크 침공은 결국 부시 몰락의 덫이 되고 말았다.
9.11 테러라는 국가 위기상황을 정치적으로 악용한 세력들의 거짓에 근거한 이라크 침공, 그리고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인권 침해,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한 부시 자신을 비롯한 그의 핵심 참모들의 오만, 독선, 소통 부재, 일방주의. 그게 바로 부시의 몰락을 불러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