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더럽히는 우리 삶 (100) 키

[우리 말에 마음쓰기 938] 'del 키', '차키', '자동차 키' 다듬기

등록 2010.07.08 13:30수정 2010.07.08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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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del 키

.. 검은 그림자가 내 등 뒤에 깔리고 / del 키 한방이면 / 그렇게 사라질지 몰라 / 사라짐에 모든 사람이 / 많은 의혹을 오랫 동안 가져도 / 오랫 동안 침묵할지 몰라 ..  "원동 마을 2" / <김규중-딸아이의 추억>(내일을여는책,2002) 94쪽


싯말인 보기글이지만 '한방'은 '한 방'으로 띄고, '오랫 동안'은 '오랫동안'으로 붙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띄어쓰기보다 "많은 의혹(疑惑)을 오랫 동안 가져도" 같은 글월을 "오랫동안 많이 궁금해 해도"처럼 손질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침묵(沈默)할지'는 '입을 다물지'나 '조용할지'나 '눈감고 있을지'로 손질해 주고요.

 ┌ 키(key)
 │  (1) = 열쇠
 │  (2)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
 │  (3) 피아노, 풍금 따위의 건(鍵)
 │  (4) 기계의 회전 부분에서 회전체와 축(軸)을 고정시키는 쇠막대 모양의
 │      부품. 회전체와 축 사이에 홈을 파서 끼운다
 │  (5) 전화나 전신에서, 신호를 부호화하여 송신하기 위하여 수동으로 조
 │      작하는 전기 스위치
 │
 ├ del 키 한방이면
 │→ del 단추 한 방이면
 │→ del 글쇠 한 방이면
 └ …

'셈틀'이나 '슬기틀'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다 보니 '자판'이라 하는 사람은 드물고 '키보드'라 하며, '글쇠'라 하는 사람은 없는 가운데 '키'라고만 합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사람들한테 '셈틀'이나 '슬기틀'이라는 낱말을 쓰라고 이야기를 하기란 어렵습니다. 가르침이나 배움을 나누기도 힘듭니다. '슬기틀' 같은 낱말은 나라와 언론사가 함께 손을 잡고 새로 빚은 낱말이지만, 사람들 스스로 이런 말을 일구었으면서 사람들 스스로 이런 말을 안 쓰고 있습니다.

하기는, '슬기틀'에 앞서 '셈틀'이 있었으나 '셈틀'부터 제대로 안 쓰는 가운데 이 낱말을 깎아내리기만 했습니다. 컴퓨터라는 기계는 셈만 하는 기계가 아닌데 셈틀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느냐고. 그런데, 우리 말 '셈'이란 숫자를 세는 일만 가리키지 않으며, 생각(헤아림)하는 일을 아울러 가리키고 있기에, 셈틀이라는 이름은 수학(과학)과 철학(문학)을 할 수 있는 기계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기도 합니다.


 ┌ 지우개 글쇠 한 방이면
 ├ 지우는 단추 한 방이면
 ├ 지움 글쇠 한 방이면
 ├ 지움 단추 한 방이면
 └ …

우리 나름대로 새로 빚는 낱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수룩하거나 어줍잖더라도 우리 나름대로 우리 터전에 알맞춤하게 갈고닦으면 되는 말입니다. 우리 깜냥껏 새롭게 일구는 말마디가 가장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자라거나 투박할지라도 우리 깜냥껏 우리 넋을 북돋우며 사랑하면 되는 글입니다.


자꾸자꾸 쓰며 익숙해야 하고, 꾸준히 쓰면서 가다듬어야 합니다. 한 번 두 번 쓰는 가운데 쓰임새를 넓히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우리 말맛과 말멋을 살찌울 수 있어야 합니다.

ㄴ. 차키

예전 설날 무렵입니다. 우리 어버이가 살던 용인으로 버스를 타고 가며 둘레에 어떤 건물이 있나 찬찬히 살펴보는데 조그마한 열쇠집이 하나 보였습니다. 이 조그마한 열쇠집 지붕께에 적힌 '차키'라는 글월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아마 이 열쇠집에서는 자동차 열쇠를 고치거나 맞추거나 만들 수 있는가 보지요.

생각을 기울여 보니, 제 동무들이건 동생들이든 선배들이든, '차 열쇠'라 말하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하나같이 '차키'라고만 말합니다.

문득 궁금합니다. 설마 '열쇠집'이라는 이름을 안 쓰고 '키스토어'라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지구마을이라는 이름이 드날리는 오늘날에는 '열쇠' 같은 우리 말은 내버리고 '키'로 고쳐서 써야 하니까, '차키'조차 아닌 '카키(car + key)'로 새 이름을 붙이고, '키스토어'든 '키숍(키샵)'으로 가게이름을 바꾸어야 할는지요.

여느 살림집에서는 '집 열쇠'이지만, 아파트에서는 '아파트 열쇠'라는 말보다 '아파트 키'라는 말이 한결 자주 쓰입니다. '키워드(keyword)'라는 영어는 우리가 쓸 만하지 않으니 '열쇠말'로 고쳐야 한다는 이야기를 더러 듣습니다만, 이런 낱말 하나를 고쳐야 한다고 말하려면, 이에 앞서 '키'라는 말부터 고쳐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 땅 이 나라에서는 우리 말글을 옳고 바르게 가르치는 흐름이 옅을 뿐 아니라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앞으로는 '열쇠'나 '자물쇠' 같은 낱말을 옳고 바르게 쓰는 사람은 더욱 줄어들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ㄷ. 자동차 키

.. 종희가 청바지 주머니를 뒤져 자동차 키를 꺼내면서 말을 가로챘다 ..  <사기사와 메구무/김석희 옮김-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자유포럼,1999) 102쪽

일본 문학을 우리 말로 옮기는 분이 '자동차 키'라는 말을 씁니다. 어쩌면 일본 문학에 '키'라는 영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지 모르고, 어쩌면 일본책에는 '키'라는 영어가 없으나 옮긴이나 한국사람 누구한테나 '키'라는 영어가 익숙하니까 이대로 적바림했는지 모릅니다.

 ┌ 자동차 키를 꺼내면서 (o)
 └ 자동차 열쇠를 꺼내면서 (x)

여느 자리에서도 우리들은 우리 말과 글을 알맞고 슬기로우며 곱게 써야 합니다. 학문을 하거나 문학을 하는 자리일 때에는 우리 말과 글을 더더욱 알맞고 슬기로우며 곱게 써야 합니다. 한 사람 말씀씀이로 그치는 문학이나 학문이 아니기에, 우리들은 더욱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쏟아 참되고 착하며 어여쁘게 말을 가다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겉스쳐 지나가는 말마디가 아닌, 곰곰이 살피고 되뇌면서 알뜰살뜰 여밀 수 있는 말투가 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영어 #외국어 #한글 #국어순화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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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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