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지키려 '봉은사'에 다녀왔습니다

문화예술인 1882명이 함께 한 4대강 시국선언대회 참가기

등록 2010.08.24 15:23수정 2010.08.2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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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고2인 조카 녀석이 '짧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서울에 가서 사촌누나와 형과 함께 프로야구 야간경기를 보고자 했다. 나도 함께 가기로 했다. 조카 녀석을 데리고 가서 세 녀석과 함께 나도 모처럼 만에 야구경기를 보고 오기로 계획을 세웠다.

 

(오래 전부터 집사람도 서울을 가서 가족이 함께 야구경기를 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그것은 좀 더 보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절대 내색을 하지 않고 열심히 잘 감내하며 살지만, 노친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때로는 꽤 짐이 되기도 한다. 자유가 없는 것은 거의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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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현수막 봉은사 정문 옆에 크게 내걸린 문화예술인 4대강사업 저지 시국선언대회 현수막. '강을 강처럼 흐르게 하라'는 말은 이미 '절규'가 되었다. ⓒ 지요하

▲ 봉은사 현수막 봉은사 정문 옆에 크게 내걸린 문화예술인 4대강사업 저지 시국선언대회 현수막. '강을 강처럼 흐르게 하라'는 말은 이미 '절규'가 되었다. ⓒ 지요하

노친을 모셔야 하는 일로 집사람은 집에 남고, 나만 조카 녀석을 데리고 서울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프로야구 야간경기를 보고 오기로 작정을 하니 아내에게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그래도 강행하기로 하고, 서울의 딸아이로 하여금 인터넷으로 표를 예매해놓도록 했다.

 

그런데 야구장 입장권을 예매해놓은 시점에서 '한국작가회의'로부터 중요한 메일을 받았다. 21일(금) 오후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 갖는 '문화예술인 1550인 4대강 시국선언대회' 행사를 알리는 메일이었다.

 

1550이라는 숫자는 4대강 사업으로 파헤쳐지는 전체 강의 길이, 1550㎞를 의미하는 것으로 시국선언에 참여할 문화예술인들의 예상 수효이기도 했다. 한국작가회의는 참여를 요청하는 말과 함께 4대강사업 반대 '한 줄 선언'를 보내 달라고 했다. '한 줄 선언'들을 모두 모아 일간지에 '전면 광고'를 낼 계획임을 말하고, 광고비로 사용할 1인 5천 원씩을 보내달라는 부탁도 곁들였다.

 

나는 그 메일을 받은 즉시 참여할 뜻을 표하는 회신을 보냈다. '한 줄 선언'은 내가 이미 오래 전에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말'을 보냈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무덤 만들기! 토건 파시즘의 광란!"이라는 말이었다. 회신 메일을 전송한 즉시 몸을 일으켜 근처 농협으로 가서 5천원을 입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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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정문 1978년 가을 어느 날 이후 3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봉은사의 정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 지요하

▲ 봉은사 정문 1978년 가을 어느 날 이후 3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봉은사의 정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 지요하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무덤 만들기"에서 '무덤'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한다. 하나는 국토 훼손과 환경파괴 등 반생명적인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토건파시즘의 자멸을 의미한다. 우리 속담에 '제 무덤 판다'는 말이 있다. 토건파시즘의 광란은 결국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무릇 이성을 잃은 상태인 발작과 광란은 무덤이 종착역인 바, 그것은 사필귀정이기도 하다.

 

나는 '문화예술인 1550인 4대강 시국선언대회'에 이름만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한 줄 선언'과 광고비 할당 5천원을 보낸 것으로 그치고, 책무를 다한 듯이 딴 일을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양심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만사제폐하고 21일 오후 봉은사를 가기로 작정했고, 딸아이에게 전화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21일 저녁의 잠실운동장 LG와 넷센 경기 입장권 예매를 취소하도록 일렀다. 

 

 <2>

 

마음 같아서는 아이들의 야구장 입장권 예매도 취소시키고 모두 봉은사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대학생 딸아이와 아들 녀석은 아빠와 함께 여러 번 '오체투지 순례기도'와 '용산미사' 등에 참례한 경험이 있어서 이해 가능한 일일 터였다. 하지만 고교생 조카 녀석이 문제였다. 여름방학에도 계속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짧은 방학을 틈타 처음으로 야구 구경을 하기로 했는데, 그것을 방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아이들은 야구장으로 보내고 나 혼자 봉은사를 가기로 하고, 21일 오전 조카 녀석을 데리고 차를 몰고 서울을 갔다. 합정동의 아이들 자취집 근처에 차를 놓고 오후 2시쯤 딸아이와 조카 녀석을 데리고 지하철을 이용하여 일단 청량리역으로 갔다. 두 녀석을 청량리역에서 기다리도록 하고, 나는 택시를 타고 장안동의 권태하 선생 댁을 찾았다.

 

동대문문화원 사무국장과 상임이사로 오랫동안 일했던 권태하 선생은 과거 MBC 문화방송 1천만 원 드라마 현상모집에 당선한 다음 '수사반장' 작가로도 활동했고 소설가로도 활동해온 분인데,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 신세를 지고 자택에서 요양 중이라고 했다. 모처럼 만에 서울 가는 길에 문병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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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참여마당 수많은 미술작가들이 그린 4대강사업 관련 그림들이 봉은사 보우당 앞뜰 한 쪽을 길게 장식했다. ⓒ 지요하

▲ 전시참여마당 수많은 미술작가들이 그린 4대강사업 관련 그림들이 봉은사 보우당 앞뜰 한 쪽을 길게 장식했다. ⓒ 지요하

권 선생 문병을 마치고 다시 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50세 전후로 보이는 얼굴인데 훤한 인상에 목소리가 묵직하고 좋았다. 그가 청량리역의 '롯데마트'가 오늘 개장을 해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 차가 제대로 빠질지 모르겠다고 걱정을 했다. 청량리역에서 내 딸아이와 조카 녀석이 기다리고 있기는 하지만 바쁜 일은 없으니 길이 좀 막혀도 괜찮다는 말을 하면서 나는 '봉은사' 얘기를 했다.

 

봉은사에서 오늘 저녁에 '문화예술인 1550인 4대강 시국선언대회'가 열린다는 이야기, 그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충남 태안에서 일삼아 올라왔다는 얘기, 1550이라는 숫자의 의미 등등…. 잠자코 듣고 있던 운전기사가 "선생님,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선생님 같은 분들이 있어서 우리 국민이 그래도 희망을 갖고 살 수 있다고 봅니다. 저희 같은 사람은 워낙 먹고 사는 문제에 얽매어서 그런 행사를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죄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이지요. 저희들을 대신해서 그런 일을 해주시는 선생님 같은 분들이 계셔서 저희는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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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보우당 뜰의 내 모습 1978년 가을 어느 날 이후 3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봉은사 안의 내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않을 수 없었다. ⓒ 지요하

▲ 봉은사 보우당 뜰의 내 모습 1978년 가을 어느 날 이후 3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봉은사 안의 내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않을 수 없었다. ⓒ 지요하

그는 '저희'라는 복수 용어를 사용했다. 발음은 정확했고, 목소리에 무게가 있었다. 나는 오히려 그에게서 감동을 받는 느낌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는 일방통행, 국민무시, 철학부재 등등의 용어를 구사했다. 그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택시는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장안동 권 선생 댁을 갈 때는 내비게이션을 이용했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요금이 5천원이나 나왔다. 그런데 청량리역으로 돌아올 때는 요금이 3400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기사에게 만원을 주면서 5천원만 달라고 했다. 그러자 기사가 손을 저었다.

 

"선생님 같은 분들께는 그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는 뜻으로 요금을 받지 않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그냥 넣어두십시오."

"그런 법이 어딨습니까. 그런 말씀 마시고 받으십시오. 그리고 5천원만 주세요."

 

운전기사는 할 수 없이 내게서 만원을 받고 5천원만 거슬러 주면서 "이거, 너무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나 역시 고맙다는 말로 답례했다.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운전기사가 사용했던 '희망'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 속에서 더욱 영피는 느낌이기도 했다.

 

 <3>             

                              

청량리역에서 딸아이와 조카 녀석을 만나 택시 운전기사 얘기를 들려주며 함께 삼성역으로 갔다. 거기에서 아들 녀석을 만났다. 아들 녀석은 학교 행정학 교수의 여름방학 '특강'을 듣고 신촌에서 곧바로 삼성역으로 온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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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들의 기원 4대강을 지키기 위한 '기원'을 담은 백등들을 오밀조밀 달고 있는 사람들 ⓒ 지요하

▲ 불자들의 기원 4대강을 지키기 위한 '기원'을 담은 백등들을 오밀조밀 달고 있는 사람들 ⓒ 지요하

"너희들을 야구장으로 보내고 아빠 혼자 봉은사를 가는 것이 영 섭섭하고 마음 아프다. 오늘은 아빠가 양보를 한다. 하지만 너희들이 야구구경을 즐기는 가운데서도 잠실구장에서 가까운 봉은사에서는 같은 시각에 대한민국 문화예술인들의 4대강사업반대 시국선언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이 세상에는 야구장에서 환호하며 희희낙락하는 사람들만 사는 게 아니고, 저 여주의 '이포보' 위에서, 낙동강 '함안보' 위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란다."

 

아이들은 미안한 표정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곧 지하철을 타고 바로 다음 역인 '종합운동장'으로 가고, 나는 삼성역에서 6번 출구를 찾았다. 출구 밖으로 나와 마침 길가에 서 있는 경찰관들에게 길을 묻고 300미터쯤 걸어 봉은사로 갔다.

 

봉은사는 1970년대 후반 문청 시절 소설가 천승세 선생을 따라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월간 '뿌리 깊은 나무' 여기자가 동행을 했다. 그때는 주변이 다 논밭이었고, 봉은사는 산림 가운데 있었다. 그 시절의 봉은사 풍경을 아슴히 떠올리자니 '상전벽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봉은사 정문 옆에 큰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강은 강처럼 흐르게 하라 / 4대강사업 저지를 위한 소리영상제"라는 큰 글자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생명의 강 살리기 문화예술인 1550인 시국선언"이라는 글귀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봉은사 경내로 들어갔다. 천주교 신자지만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대웅전 쪽을 향해 깊이 허리 굽혀 예를 올리고 '보우당'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전시참여마당'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술가들의 수많은 판화작품들이 길게 전시되어 있었다. 각 장르 예술인들이 고루 참여하는 행사임을 실감시켜 주듯 보우당의 너른 앞뜰에는 많은 도서들과 미술작품들과 조형물들, 갖가지 악기들과 음향 기기들이 다 모여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그 풍경을 둘러보면서 나는 문득 봉은사는 한국불교의 '심장'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나라를 '변란'으로부터 구해내는 '호국불교'의 위용을 갖추어 가고 있는데, 그 중심에 봉은사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한때 나는 불교를 혐오했었다. 특히 5공 때 더욱 그랬다. 그리고 '문민정부' 시절 전두환이 법정에 섰을 때 재판이 열리는 날마다 불교 신자들이 법정을 메운 채 전두환을 엄호(?)하는 것을 보면서 <불교는 '참회'가 필요 없는 종교인가?>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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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등불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김정헌 선생,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 <녹색평론> 대표 김종철 선생(왼쪽부터)이 행사 시작 전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지요하

▲ 우리 시대의 등불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김정헌 선생,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 <녹색평론> 대표 김종철 선생(왼쪽부터)이 행사 시작 전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지요하

그런 불교가 오늘날에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일에 있어서 어느 종교보다도 앞장서고 있다. 한국 종교계를 이끌어가는 모습이다. 그 일을 어제까지는 천주교가 담당해 왔는데, 이제는 불교로 교체가 된 형국이다.

 

천주교 신자로서 그것이 좀 섭섭하긴 하지만, 그래도 불교가 그 일을 대신하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지 모른다. 나는 진심으로 한국불교에, 그리고 봉은사에 감사한다. 실은 그 고마운 마음 때문에, 그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무더위를 무릅쓰고 태안에서 먼 길 걸음을 한 것이었다.

 

나를 잘 아시는 사진작가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이 내게 "오늘은 명동성당인 아닌 봉은사에서 지 선생님을 뵙게 됐네요"라는 말을 했다. 나는 야릇한 충격을 머금으며 이런 말을 했다.

 

"이런 뜻 깊은 행사가 명동성당에서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천주교 신자로서 솔직히 큰 슬픔을 느낍니다.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에 계속 시달리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봉은사에서 이런 행사가 열린다는 사실에 큰 위안을 받습니다. 한국불교에서 희망을 봅니다. 불교마저 생명과 평화, 민주주의 위기 문제에 눈을 감는다면 내가 어떻게 오늘을 견디며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곤 해서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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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영상제 시작 문화예술인 4대강 시국선언대회의 한 가지인 '소리영상제'의 시작을 국악기를 다루는 젊은 음악인들이 힘차게 열고 있다. ⓒ 지요하

▲ 소리영상제 시작 문화예술인 4대강 시국선언대회의 한 가지인 '소리영상제'의 시작을 국악기를 다루는 젊은 음악인들이 힘차게 열고 있다. ⓒ 지요하

'강을 강처럼 흐르게 하라'는 표어를 내건 '4대강사업 저지를 위한 소리영상제'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김정헌 위원장,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그분들께로 가서 인사를 드렸다. 직접 뵙고 인사를 드리기는 처음이었다.

 

내게 명진 스님께 "이런 행사가 봉은사에서 열리게 되어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지 모릅니다. 스님,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니, 명진 스님은 일어서서 염주 드신 손을 합장하며 답례를 했다.

 

무대에 오른 <녹색평론> 대표 김종철 선생은 "4대강 파괴사업은 단순한 환경파괴가 아니라 국가변란"이라고 했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이지 우리는 지금 변란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국토를 수호해야 할 임무를 안고 있는 대통령이 지금 헌법을 유린하고 위배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국가변란세력을 온몸으로 막아 싸워야말 역사적 책무를 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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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스님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이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통해 '헤학'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가슴 쨍한 웃음을 선사했다. ⓒ 지요하

▲ 명진 스님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이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통해 '헤학'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가슴 쨍한 웃음을 선사했다. ⓒ 지요하

 

무대에 오른 명진 스님은 "김종철 선생이 너무 유식한 고급 표현으로 말씀을 하시니 무식한 '저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말로 웃음을 선사했다. "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하겠다"고 전제한 후 정말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참석자들을 여러 번 웃기기도 했다.

 

"지난 정부들에는 제각기 이름이 있었습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등…. 지금 정부는 이름이 없는데, 우리가 확실하게 이름을 지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정부는 너무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부입니다. 몰염치하고 파렴치하고 후안무치하죠. 그 치들을 모아서 '무치정부'라고 불러야 합니다. 또 하는 일이 삽질밖에 없으니 '삽질정권'이라고 해야겠죠. '무치정부, 삽질정권'이 이명박 정부의 정확인 이름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갖가지 이름의 동우회가 참 많습니다. 이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과 정치인들이 나중에 이런 동우회를 만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위장전입동우회, 병역기피동우회, 막말동우회 등등을 만들어 이명박 대통령이 총동우회장을 맡으면 아주 잘할 것 같습니다."

 

명진 스님의 해학에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웃음 뒤에는 한숨을 내쉬고 눈물도 머금어야 했다. 그것이 해학의 매력일 터였다. 명진 스님의 그 해학들을 여기에 다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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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을 가둑 메운 문화예술인들 남녀노소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한데 모여 생명을 지키기 위한 열의를 되새겼다. 가족을 동반한 이들도 많았다. ⓒ 지요하

▲ 객석을 가둑 메운 문화예술인들 남녀노소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한데 모여 생명을 지키기 위한 열의를 되새겼다. 가족을 동반한 이들도 많았다. ⓒ 지요하

나는 소리꾼들의 노래를 듣고 춤꾼들의 무용을 보면서 틈틈이 경향신문의 '전면광고' 외로 별도 인쇄된 1882개의 문장들에 눈을 주기도 했다. 애초 1550명을 목표로 시국선언을 준비했지만, 제안 20일 만에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1882명이 이름을 올렸다고 했다. 1882개의 문장이 모여 거대한 한 편의 글이 된 셈이었다.

 

문화예술인 1882명은 한 목소리로 4대강 사업은 "강에 대한 살해"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자연이 없이는 그 어떤 예술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화려한 수사로도 그 죽음의 현장을 미화할 수 없"기에 시작된 시국선언이었다. 

 

"4대강 사업을 중단시키지 못한다면 이명박 대통령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역사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나는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되새기며 끝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하늘에 뜬 반달이 고층건물들 머리 위에서 봉은사의 보우당 앞뜰을 알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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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7월 11일의 달 일몰 전에 얼굴을 내민, 보름을 향해 가는 달이 봉은사 보우당 뜰에 미소를 보내주고 있다. ⓒ 지요하

▲ 음력 7월 11일의 달 일몰 전에 얼굴을 내민, 보름을 향해 가는 달이 봉은사 보우당 뜰에 미소를 보내주고 있다. ⓒ 지요하
2010.08.24 15:23 ⓒ 2010 OhmyNews
#4대강사업 저지 #문화예술인 시국선언 #봉은사 #명진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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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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