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년 백기완에게 박수를 보낸다

10월 8일자 <한겨레신문> 한홍구-서해성 '직설'을 읽고

등록 2010.10.08 14:29수정 2010.10.08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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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로 기억된다. 당시 시인 조태일이 경영하던 '시인사'라는 출판사가 있었는데, 1979년 그곳에서 책을 한 권 '찍어냈다'. '발간했다' 혹은 '출판했다'가 아닌 '찍어냈다'라고 일부러 표기한 것은 이유가 있다. 엄혹한 어둠의 시절, 박정희 독재 철권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라 그에 반대하는 사람은 글을 쓸 수도 책을 만들어 낼 수도 없던 시절에 백기완은 급하게 책을 한 권 세상에 선보인 것이다.

 

아무리 급하게 찍어내도 책의 수준은 최고급이었다.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면서 오탈자를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아마 직원도 두지 못하고 조태일이 혼자 일일이 교정을 보고 수정을 본 덕택이 아닌가 싶다. 조태일은 글에 만큼은 지나치리만큼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빛을 보게 된 게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라는 백기완의 책이다.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이니까 넓게 볼 때 수필의 범주에 속하겠지만 책 속에는 그것 이상의 묵직한 그의 민중 철학이 담겨 있다. 사람들이 그 책을 어떻게 보는가에 상관없이 나는 이 책을 그래서 철학서로 분류하고 있다.

 

백기완의 철학은 남다르다. 그는 기존의 철학에 반기를 들고 그의 생각을 전개한다. 그에게는 고대 소트라테스나 플라톤 그리고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근대의 칸트나 헤겔도 한낱 철학을 위한 철학자다. 수많은 역사 인물들이 그들의 학문을 전수받아 글을 쓰고 사람들을 가르치며 밥을 먹어왔지만 백기완에겐 기존의 이름 있는 철학자들이 그저 그런 서생(書生)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역사의 주체 '민중'이 빠져있기 때문에 백기완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는 제목부터가 선동적이다. 우리 고유의 치마저고리를 입은 고구려 여성이 말을 타고 대륙을 휘젓는 기상을 그리고 있는 서문은 나라의 민주화를 바라는 젊은 학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현모양처(賢母良妻)니 부창부수(夫唱婦隨)니 늘 남자에 종속된 삶을 강요받은 우리의 여인들에게 역사의 수레를 이끄는 당당한 여성이 되라는 주문을 이 책은 담고 있다. 벌써 30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의 글은 말과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글에 힘이 있고 사람을 깨우는 마력이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것은 젊은이다운 젊은이, 개인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참된 젊은이가 되라는 메시지를 글로 말로 행동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백기완 선생을 오늘(2010년 10월 8일) <한겨레신문>에서 한홍구와 서해성이 풀어가는 '직설'에서 만났다. 여전했다. 악이 관영하고 있는 세상에서 반독재와 민주화에 헌신해 온 분을 여전하다, 변함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선(善)일 가능성이 많다. 나는 그가 만 77세, 우리 나이로 팔순을 이태 앞둔 노인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만년 청년일 것 같던 백 선생이 노인 중에 상노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말꾼 한홍구와 서해성이 질질 끌려 다닐 정도로 그는 '직설'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의 대화에서 백 선생이 지니고 있는 정신과 철학은 그를 둘러싸고 있던 환경의 결과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도 누구 못지않게 환경의 지배를 받아온 사람이다.

 

황해도 출신의 민중 가문(?),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어온 이야기. 그 이야기는 우리 민족정신이 깃든 내용을 갖고 있어서 알게 모르게 백기완에게 영향을 미쳤다. 영향을 미친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강력한 힘으로 재결집되어 세상에 토해지게 된 것이다. 1960년대 장준하 선생과 반정부 투쟁을 할 때, '재야'라는 말을 그가 언론에 제안해 쓰게 되었다고 것도 새로운 이야기이고, '새내기'(신입회원), '동아리'(써클), '먹을거리'(음식품) 등의 순우리말도 그가 쓰기 시작해서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에서 그의 강렬한 '우리 의식'을 읽을 수 있다.

 

나는 백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저런 분이 조직적 지도력까지 담보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누군가 말했지만 백 선생은 백 년에 한 명 정도 나올 수 있는 선동가이다. 대신 그는 조직적 운동가는 아니다. 그의 선동력에 조직력까지 갖춘다면 역사의 흐름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발산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그는 조직 운동가는 아니다. 아니 그에게 이 두 가지를 다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우리나라의 사회운동치고 백 선생을 대표 또는 고문 등 자기 단체와 관계 짓지 않는 조직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자리에 걸맞은 조직적 지도력을 백 선생이 행사한 적은 거의 없다.

 

백 선생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난다. 선동가가 흩어져 있는 군중 속의 한 사람을 만날 때는 조직보다 개인의 감성이 앞서기 쉽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오래 지속해서 만날 것을 전제하지 않고 대하는 습성이 있다. 그냥 즉흥적이다. 변혁에 대한 웬만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그의 말에 상처받고 쉬 떠나게 된다. 조직적 후속 작업까지는 생각할 여지가 없게 된다. 나는 백 선생에게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이기적 관념주의자라고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지만 그는 그의 생각을 시종일관 견지해 나가고 있다.

 

사실 나도 한동안 그를 몹시 좋아하고 따랐다. 1987년 대선 국면에서 내가 관계하는 단체(서울민중연합 민족학교)는 후보단일화 쪽에 서서 일을 했지만 나는 틈나는 대로 독자후보(민중후보 백기완 지지파) 쪽의 일을 봐주었을 정도로 그에게 경도되어 있었다. 내가 결혼 주례로 백 선생을 모실 정도로 그는 내 운동과 삶의 멘토였다. 나는 그에게 주위에 있는 젊은이들을 기를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이행되지 않았다. 이행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문제조차 백 선생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고 십 수 년이 흘렀다. 내가 목회지를 따라 지방으로 내려온 이후 백 선생이 주관하는 무슨 무슨 행사에 오라는 초청장을 받았지만 응하지 못했다. 그와의 개인적 만남은 더 이상 없었던 것이 된다.

 

그런 백 선생을 오늘 신문 지상에서 만났다. 그도 많이 쇠해 있었다. 만년 청년으로만 생각하던 백 선생이 입은 까만 두루마기에서 시대의 풍상과 아픔 그리고 그의 연륜이 피어 나왔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의식이 변하기 마련이다. 그 변화는 미숙에서 완숙으로, 강함에서 온화함으로, 좁음에서 넓음으로의 바뀜이 되어야 바람직할 것이다.

 

'대한민국 어버이연합' 등 실체도 불분명한 단체의 노인들이 좌빨 추방을 외치며 역사의 물꼬를 거꾸로 틀어대는 모습이 아니라 사회가 잘못 돌아갈 때 엄중히 지적하며 순역사(順歷史)의 물꼬를 터주는 원로들처럼 말이다. 백 선생은 그런 흐름에 연로한 연치 속에서도 젊음을 토로하는 이 사회에 몇 안 되는 원로다. 다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이런 분도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팔순까지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환갑만 지나도 상노인에 속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의 자연 수명이 많이 연장되어 팔순이 지나도 건강을 유지하며 의미 있게 살아가는 분들이 많다. 백 선생도 건강하게 오래 사시면서 젊은이들에게 멀어져 가는 참된 이야기, 민중 중심의 공동체 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기 바란다. 그의 말에 대한 응답이 점점 잦아든다 할지라도 소수의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들어준다면 자족하고 말이다. 그 소수가 역사의 물결을 바로 잡는 일을 할 것으로 믿으면서 말이다. 청년 백기완에게 지지의 박수를 보낸다.  

2010.10.08 14:29 ⓒ 2010 OhmyNews
#백기완 #반독재 #민주화 운동 #'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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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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