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평생 농사만 지었는데, 정부가 원망스럽다"

충남 태안군 벼 백수피해 농민들, 총궐기대회 열어

등록 2010.10.12 17:35수정 2010.10.12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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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살 같은 알곡을 태우는 농심(農心)을 나랏님은 아는지요. 성난 농심이 드디어 자신들이 피와 살 같은 알곡에 불을 질렀다.

잦은 비와 수확기에 닥친 제7호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충남 태안군 내 들판의 알곡들이 쭉정이로 변하는 백수현상으로 인한 피해가 확산되고 있으나, 정부가 뚜렷한 대책 없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a  한 촌로가 전량수매를 주장하는 현수막에읮한채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한 촌로가 전량수매를 주장하는 현수막에읮한채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 ⓒ 신문웅


12일 오전 10시 30분경 충남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안흥 농장 인근 들판에 모인 태안군백수피해대책위원회 소속 농민 1000여명은 태안 백수피해 농민 총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정부의 무성의를 규탄했다.

이 자리에서 팔순의 노인 등 3명 농민들이 삭발식을 열고 백수 피해를 입은 벼와 할머니들이 자른 머리카락 그리고 농민들의 편지를 담아 이명박 대통령, 박희태 국회의장 등에 보내는 택배 퍼포먼스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어 백수피해 벼 불 지르기, 결의문 낭독 등에 이어 백수현상 심한 논 4필지(2000여평)를 트랙터(15대)로 갈아 업고는 태안군과 태안군 의회에 결의문을 전달했다.

a  불타는 피같은 나락들

불타는 피같은 나락들 ⓒ 신문웅


궐기대회 참석자들은 오는 15일까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백수피해 벼 전량수매, 생계비 지원, 무이자 영농자금 예산 책정 등의 요구사항에 대한 답변이 없을 경우 추가적으로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결의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궐기대회에서는 환갑을 넘게 농사만을 지어온 지종식(61, 태안읍 어은리)씨가 낭독한 '어느 촌로의 편지'라는 글이 낭독되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다음은 지종식씨가 낭독한 편지글 전문이다.

a  지종식씨가 편지글을 낭독하고 있다.

지종식씨가 편지글을 낭독하고 있다. ⓒ 신문웅


어느 촌로의 편지


농민으로 살아 온 세상
크게 욕심내지도 않았습니다.
게으름 피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한 평생 순리대로 살았습니다.

너무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르는 날에도


농민으로 사는 것을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를 탓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알찬 결실을 기다리는 보람으로 살았습니다.

서른 마지기 알곡 팔아 늦둥이 막내아들 대학등록금 보내고 나면 빈손만 남았지만
조금도 아까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읍내사는 부자 동갑네들이 부럽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아들놈 공부시켜 농사꾼 안 시키려는 희망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9월 2일 새벽에 불어 닥친 태풍으로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습니다.

곱디곱던 마누라 농사꾼한테 시집와서 40여년을 농사일에 지치고 쓰러져도 불평한번 하지 않고 팔이며 무릎이며 덕지덕지 파스붙이고 견디면서도 새벽부터 밤중까지 농사와 씨름하는게 너무나 미안하고 안타까워서 작년 이맘때 거칠어진 마누라 손잡고 작은 소망을 약속했습니다.

막내아들 대학졸업 할 때까지 3년만 더 고생하자고
그리고 그때는 우리도 남들처럼 둘이서 손잡고
물놀이 단풍놀이도 다니면서 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약속도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원망스럽습니다.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세상이 원망스럽습니다.
정부가 원망스럽습니다.

평생을 피땀으로 일궈온 서른 마지기 농토를 바라보면 눈물이 납니다.
충실한 낱알 하나 없이 하얗게 말라죽은 벼이삭을 바라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당장 올해 영농비로 빌려 쓴 영농자금 갚을 길이 막막합니다.
무엇보다 모든 희망을 걸었던 대학생 막내아들 내년도 학자금이 없어 휴학시켜야 하는 무능한 아버지의 마음 죽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농사꾼으로 살아온 육십여년의 인생 아무리 질기고 기구하더라도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 없어 간절히 호소 드립니다.

대통령님과 정부가 나서서 이 볼품없는 촌로의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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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웅

#벼 백수피해 #태안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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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시대를 선도하는 태안신문 편집국장을 맡고 있으며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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