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0년, 이제와 면사포 쓰고 싶다는 아내

등록 2010.11.12 08:40수정 2010.11.12 08:4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의 나이는 오십 중반, 아내는 내일 모레 50으로 접어든다. 우리가 결혼을 한 지도 20년이 지났다. 알콩달콩 세 아이 키우며 무난히 여기까지 왔다. 어려운 생활을 감내하며 삶을 함께 일구어온 아내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을 아내로부터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1990년에 결혼을 했다. 사회운동 단체에서 임원과 회원으로 만나 사랑을 싹 틔운 것이다. 나는 직업 운동가로 한 재야 단체 책임을 맡고 있었고, 아내는 성실한 직장인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면서 시간 나는 대로 내가 활동하고 있는 사회 단체에 나와 봉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의 결혼에 처가의 반대는 의외로 강했다. 말이 좋아 사회 운동가이지 백수건달과도 같은 노총각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반대의 주된 이유였다.

아내의 굳은 결심이 씨가 되고, 마음엔 내키지 않지만 딸의 의사를 존중할 수밖에 없다는 장모님의 간접 지원에 힘입어 우리는 결혼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때, 아내는 나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일신을 돌보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그리고 민중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투쟁하는 나의 모습에 그녀는 경이로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자신이 직접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 해 주고 있다는 부채 심리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기로 단단히 약속한 우리가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소위 '민중결혼식'이란 것을 제안했다. 아니 나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던 그녀에게 통보했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한 말일 것이다. 나는 몇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먼저 주례는 백기완 선생으로 한다. 둘째, 교회는 당시 홍근수 목사님이 담임으로 있던 향린교회로 한다. 셋째, 서양식 면사포와 웨딩 드레스는 피하고 우리 고유의 한복을 입는다. 넷째, 사랑은 마음이 중요한 만큼 반지 시계 등 예물은 아예 생략한다.

이렇게 시작한 우리의 혼인 생활은 지하 단칸방에서부터 출발했다. 신혼 방도 아내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얻었고, 살림살이도 최소한의 것으로 한정해서 필요한 것만 아내가 장만했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 직장을 나갔고, 나는 사회운동 지속했다. 1990년대 초 소련을 위시해서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은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했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도 있었고, 그 방법에 변화를 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후자에 속했다. 신학을 공부해서 민중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목양의 길을 걸을 결심을 했다. 목사가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농촌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지금도 어려운 농촌에서 주님의 일에 전념하고 있다. 결혼 생활 20년은 부부 사이의 거리를 한층 줄어들게 만든다. 아이들도 성장해서 부모의 영향권을 벗어나려고 하는 시점이다. 하지만 아직도 가끔 우리 둘 부부 사이가 삐그덕댈 때가 있다.


아내의 말 중 듣기 거북한 소리는 나에게 속아서 결혼했다는 것이다. 속은 결과 면사포도 쓰지 못하고 소복을 입고 결혼식을 올렸으며, 또 속아서 결혼 예물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대가를 치르라며 마음을 후벼팔 때는 할 말이 별로 없다. 민사소송도 10년이면 시효가 만료된다는데, 20년이 흐른 지금 면사포에 결혼 예물을 해 달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 거냐고 볼멘소리를 내 보지만 아내는 아랑곳없다. 금년이 만 20주년 되는 해이니 만큼 넘기지 말고 다시 결혼식을 그럴듯하게 올려 달라는 것이다.

아내는 주위 사람들을 동원해서 나를 압박해 오기도 한다. 나의 친구들과 후배들 심지어 시댁 식구들에게까지 '암, 그렇게 해야지, 해야 되구 말구'라는 반승낙을 받아 힘을 실어 나를 압박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음미하며 살아야 하고 가치 있게 살아야 한다.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는 그 일을 해보는 것에서도 의미를 캘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 하나, 즉 50이 다 되어 면사포를 씌어달라는 것은 내가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나는 아직 그 때의 정신을 훼손하고 싶지 않다. 세속에 물든 삶이 아닌 정신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물질 있는 곳에 마음 간다는 세상적 말을 거부하고 정신의 소중함을 존중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내는 그 정신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느냐며 이의를 제기한다. 마음을 꺼내 보여 확인시켜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한 해 얼마나 많은 쌍이 결혼을 하고 또 헤어지고 있는가? 우리가 헤어짐의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여기까지 살아온 것도 사랑의 마음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의 아내 사랑하는 마음은 결혼할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이것은 이 세상 삶 다할 때까지 변함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면사포며 무슨 웨딩마치가 새삼스럽게 필요할까. 하지만 아내 몰래 한 가지 구상하는 것이 있다. 여자가 일생 한 번 써보는 면사포를 굳이 쓰고 싶다면 이런 대안 정도는 계획할 수 있으리라. 결혼 25주년에 올리는 기념식을 은혼식이라고 한다. 20주년이 아니라 25주년 때 가까운 지기들을 초청해서 지금까지의 삶을 감사하며 은혼식을 올리는 것이다. 아내가 좋아한다면. 속담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의 그쯤 소원이야.

아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살아온 인생이다. 그녀는 늘 주위 사람을 돕는 삶을 살아왔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오빠와 여동생을 대학 공부시키고, 또 뒤늦게 나를 신학 공부 시킨 것도 모두 아내의 공이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정작 자신을 챙길 여유가 전혀 없었던 아내이다. 지금도 이웃에 불쌍한 사람들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런 아내의 삶을 나는 '봉사와 섬김의 삶'이라고 명명해준 적이 있다.

그런 아내이기 때문에 가끔 자기 자신을 찾고 싶을 때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결혼식 때 써보지 못한 면사포를 쓰고 사랑하는 남편과 결혼식을 다시 올리고 싶어 하는 것도 자아를 발견하고 싶은 생각의 일단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지금까지 살아준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가 되지 않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이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젊음을 불태워온 아내에 대한 보상으론 턱 없이 부족하겠지만 말이다. 아내를 깊이 생각하면 한 없이 약해지는 내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과거로 돌아가게 만든다.
#은혼식 #민중결혼식 #농촌목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3. 3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4. 4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5. 5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