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 '재스민 혁명'과 4월혁명은 닮았다

[取중眞담] 머나먼 나라의 시민들에게 연대감 느끼는 이유

등록 2011.01.29 22:03수정 2011.01.29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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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1월 24일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 시위대가 벤 알리 전 대통령의 사진을 불태우고 있다. 시민들은 이날 구체제 인사들이 참여한 과도정부에 반발하며 시위를 벌였다. ⓒ AP=연합뉴스


북아프리카가 뜨겁습니다. 날씨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 언론들도 심심찮게 보도하고 있는 민주화 시위 때문입니다. 독재자들을 떨게 하고 있는 이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곳은 튀니지입니다. 2000여 년 전 로마와 자웅을 겨뤘던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을 배출한 땅이지요.

튀니지 사람들은 아프리카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민혁명(국화인 재스민에서 이름을 따 '재스민 혁명'이라고 불리지요)을 통해 독재자를 몰아냈습니다. 그런데 공간도 다르고 51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있음에도 '재스민 혁명'은 우리의 4월혁명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그럼, '재스민 혁명'과 4월혁명의 전개 과정을 되짚으며 비교해볼까요?

[닮은 점 ①] 권력 연장에 눈먼 염치없는 독재자

튀니지는 195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합니다. 그 후 55년 동안 튀니지 대통령은 단 2명뿐이었습니다. 먼저 초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가 1987년까지 재임합니다. 그 뒤를 이은 지네 알 아비디네 벤 알리가 23년간 대통령 노릇을 합니다.

벤 알리는 종신 대통령이던 부르기바를 밀어낸 후 종신 대통령 제도를 없애겠다고 공언합니다. 그러나 그는 2002년 사실상 종신제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뜯어고칩니다. 그 과정에서 경찰을 활용해 반대 세력을 힘으로 누르고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높은 물가와 부족한 일자리로 국민들이 고통받는 동안, 벤 알리의 친인척들은 은행, 언론사 등을 소유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습니다. 벤 알리의 부인은 '재스민 혁명'으로 튀니지를 떠날 때 금괴 1.5톤을 빼돌린 것으로 알려졌지요.

1948년부터 12년 동안 국가 최고 지도자였던 이승만 대통령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 오래 머물기 위해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우의마의 사건
1956년 당시 81세이던 이승만 대통령은 속마음과 달리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본인은 원치 않지만 국민들이 원하니 대통령 선거에 다시 나선다는 모양새를 갖추고자 한 것이지요.


그러자 전국 곳곳에서 '각하의 출마를 원한다'는 관제 민의(民意) 시위가 벌어집니다.

그중 우마차조합이 우마차 800대를 끌고 나와 "소와 말까지 원한다"라고 외치면서 시위를 했는데, 이로 인해 서울 거리가 동물들의 분뇨로 범벅이 돼 시민들이 코를 싸쥐고 다녔다고 합니다.
우선 헌법을 두 번 뜯어고칩니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부산정치파동(국회의원 통근버스를 헌병대로 연행해 이른바 국제공산당사건을 조작한 사건)을 일으켜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고친 발췌개헌입니다.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던 기존 헌법대로 하면 재선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이 벌인 일이었지요. 전선에서는 매일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후방에서는 피난민들이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때 대통령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 유명한 1954년 사사오입 개헌입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을 넣어 이승만이 계속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한 것이지요.

1956년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저세상으로 보내고, 부정선거(4할 사전 선거, 3인조·5인조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를 일삼은 것도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956년 우의마의(牛意馬意) 사건처럼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집니다.

[닮은 점 ②] 평범한 젊은이의 죽음, 독재를 무너뜨리다

상황이 이러하니 튀니지에도, 51년 전 한국에도 국민들의 원망이 쌓였습니다. 폭발을 위한 필요조건이 갖춰진 셈이지요. 그러나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는 거대한 운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재스민 혁명'과 4월혁명에서 그 계기를 마련해준 건 평범한 젊은이의 죽음이었습니다.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중부의 시디 부지드에서 한 청년이 자기 몸에 불을 붙입니다. 무하마드 부아지지라는 26세의 이 청년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과일 노점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이를 단속했고 그 과정에서 부아지지는 공개된 장소에서 따귀를 맞는 모욕을 당합니다. 부아지지는 이에 항의하고자 분신을 택합니다.

부아지지가 분신한 후 시디 부지드에서 시위가 벌어지지만, 이것이 독재자 벤 알리의 퇴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올해 1월 4일 부아지지가 끝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위는 수도 튀니스를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됩니다. 그리고 부아지지가 분신한 후 딱 4주가 지난 1월 14일, 벤 알리 대통령은 튀니지에서 달아납니다.

4월혁명 때도 이와 비슷하게 상황이 전개됐습니다. 4월혁명은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벌인 시위로 시작됩니다. 이승만 정권이 야당 후보의 유세장에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요일임에도 학생들을 등교시키고 노동자들을 전원 출근시키자, 고등학생들이 들고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대통령 선거 당일이던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때 경찰이 발포해 8명이 사망하고(9명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80여 명이 다칩니다.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은 이에 대해 "총은 쏘라('쓰라'로 들었다는 이도 있습니다)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는 망언을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점차 고조되던 독재 반대 시위에 기름을 부은 건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오른 한 구의 시신이었습니다. 3월 15일 시위 때 행방불명됐던 17세 소년 김주열의 주검은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눈부터 뒤통수까지 관통당한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민간인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시신을 바다에 가라앉혀 사건을 은폐하려 한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4월 19일 서울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와 4월 25일 교수단 시위는 정권을 더 곤혹스런 처지로 몰아넣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합니다.

부아지지와 김주열. 시대도, 처지도, 사망 경위도 달랐지만 평범했던 이 두 젊은이의 고귀한 희생으로 역사의 물길이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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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의거기념탑에 놓인 김주열 열사 영정 사진과 꽃. ⓒ 윤성효


[닮은 점 ③] "테러리즘"-"공산주의" 매도, 권력자들의 공통 반응

시위에 대한 권력자들의 반응도 묘하게 겹칩니다.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불순한 무리로 매도한다는 점도 닮았습니다.

부아지지의 죽음으로 시위가 확산되자, 벤 알리 대통령은 올해 1월 10일 국영TV에 출연해 이렇게 말합니다. "폭도들이 자신의 영혼을 극단주의와 테러리즘에 팔아먹었다." 물론 이와 함께 앞으로 일자리 30만 개를 만들어내겠다는 말도 하지만, 대통령 발언의 무게중심은 시위대를 매도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보입니다. 김주열의 주검이 떠오른 후 시위가 번지자, 1960년 4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 담화문을 발표합니다. 마산 시위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홍진기(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인) 내무부 장관이 "마산 소요에 5열(간첩) 개재의 혐의가 있다"는 담화를 발표하는 등 정권 차원에서 민주화 시위대에 색깔론 딱지를 붙이려 한 것이지요.

[닮은 점 ④] 군대와 경찰은 달랐다

시위대를 막는 과정에서 군대와 경찰이 다른 태도를 보인 것도 '재스민 혁명'과 4월혁명의 닮은 점 중 하나입니다.

1월 14일 벤 알리 대통령은 총을 쏴서 시위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군에 내립니다. 그러나 튀니지군은 대통령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군이 이런 태도를 취하자, 벤 알리는 바로 그날 외국으로 달아납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들은 군을 신뢰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와 달리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해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벤 알리 하야 후에는 일부 경찰이 "국민과 함께하고 싶다"며 과도정부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에 동참하는 모습도 나타났습니다.

4월혁명 때도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한 건 경찰이었습니다. 그와 달리 군은 시위대를 막는 데 동원되기는 하지만, '발포하지 말라'는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쏘지 않습니다.

[닮은 점 ⑤] 하야 후 구세력으로 채워진 과도정부

혁명 과업을 충실히 이행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면, 시민들이 피 흘려 얻어낸 민주주의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독재자가 물러간 후 구성된 과도정부가 시민들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점에서도 '재스민 혁명'과 4월혁명은 닮았습니다.

1월 17일 구성된 튀니지 과도정부를 구성한 23명 중 8명은 벤 알리 정권에서 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과도정부에서 내무, 외무, 국방, 재무 등 핵심 부서를 맡았습니다. 또한 과도정부를 이끌고 있는 간누치 총리는 벤 알리의 측근이었습니다.

그러자 간누치 총리를 비롯한 구 정권 인사들의 퇴진과 벤 알리 정권을 떠받친 여당의 해체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과도정부가 그처럼 구성된 것을 혁명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간누치 총리는 1월 27일 지난 정권 출신 인사 3명(외교·국방·내무부 장관)을 과도정부에서 내보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렇지만 총리 본인은 퇴진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고, 여당 역시 아직 해체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한국도 이와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 과도정부를 이끈 허정은 "이승만의 표면상의 심복은 이기붕, 이면의 심복은 허정"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승만이 신뢰한 측근이었습니다. 또한 과도정부의 관료, 경찰, 판검사는 대부분 이승만 정권 때부터 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이 요구한 혁명 과업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부정축재자, 부정선거 주동자, 시민에게 총을 쏜 경찰 책임자 등에 대한 처벌은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1960년 7.29총선을 통해 수립된 장면 정부 역시 경찰 숙정 작업을 한 것 이외엔 허정 과도정부와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반영돼 1960년 10월 법원이 3.15부정선거 주범들의 형을 깎아주거나 무죄를 선고하자, 4월혁명 때 다친 사람들이 목발을 짚고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을 점거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1월 22일(현지 시각)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 젊은이들이 촛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있다. 튀니지에서는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시위를 하다 사망한 희생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이날부터 사흘 동안 국기를 조기로 게양하고 방송국의 코란 암송 등의 의식이 계속됐다. ⓒ AP=연합뉴스


닮았지만 똑같은 건 아니다

이처럼 '재스민 혁명'과 4월혁명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똑같지는 않습니다. 다른 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약탈 문제입니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직후 튀니지는 일시적으로 혼돈에 빠져듭니다. 벤 알리 정권의 경호요원들을 비롯한 일부 무장세력과 정부군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하고, 부유층 거주지를 비롯해 곳곳에서 약탈이 벌어진 것이지요. 칼, 도끼, 총, 몽둥이 등으로 무장해 자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약탈이 횡행한 이런 혼돈 상태는 다행히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4월혁명 후 한국에서는 이런 약탈 상황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무장세력의 난동도 없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혁명이 영향을 끼친 범위입니다. '재스민 혁명' 후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제2의 튀니지'를 꿈꾸는 시민들과 '제2의 튀니지'만은 피하려는 정부 간의 힘겨루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더 나은 밥을 요구하는 시위가 알제리, 예멘, 이집트 등 인근 국가들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튀니지 인근 국가들의 독재자들이 바짝 긴장하는 모양새입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28일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과 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4월혁명은 주변 국가로 확산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4월혁명의 의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4월혁명은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얼어붙었던 한국 사회가 깨어나고 한국인들이 자부심을 갖는 계기였습니다. 반공 독재 정부가 강요했던 오랜 침묵은 4월혁명을 통해 깨졌습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 노동운동, 분단 해소 운동 등이 4월혁명 후 터져 나온 것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납니다. 1년 후 5.16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민주주의는 다시 후퇴하지만, 4월혁명의 기억은 그 후 한국 민주주의가 다시 일어서는 데 중요한 영감으로 작용합니다.

4월혁명 후에도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지난한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재스민 혁명'을 성공시킨 튀니지 사람들 앞에 놓인 길도 그리 평탄해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들 역시 과거에 한국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험한 길을 걸어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한국처럼 곧바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할 것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튀니지뿐만 아니라 이집트 등 그 인근 국가들의 시민들도 마찬가지일 터이고요.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그럼에도 가야 하는 길임을 알고 있는 한국인들이 '재스민 혁명'으로 촉발된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의 변화 과정을 애정 어린 눈길로, 연대감을 느끼며 더 관심 있게 바라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튀니지 #재스민 혁명 #4월혁명 #이승만 #김주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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