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가실 줄 몰랐습니다... 어머니"

[공모-불효자] 학생운동, 그리고 투옥까지... 임종 지키지 못한 아들의 한

등록 2011.04.28 18:51수정 2011.04.29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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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아들의 나이는 마흔여섯이 되었습니다. 23년 전인 88년 8월, 마흔여섯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와 같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스물 셋이었던 그해부터 지난 23년 동안 아들은 어머니를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젊디 젊은 나이에 2남 4녀의 많은 자식들을 세상에 남겨 두고 서러운 눈물 흘리시며 눈도 편히 감지 못하신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당신 몸 돌볼 겨를이 없었던 6남매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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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사진에 계신 분이 어머니. 왼쪽에 계신 분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들의 담임선생님이자 어머니가 초등학교 다니실 때의 담임선생님. ⓒ 김종호


충청남도 홍성, 농사짓는 평범한 집안의 2남 4녀 중 맏이로 태어난 아들은 장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님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너는 장남이니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가야한다"면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아들에게 과외까지 시켜주셨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극성 아님 극성과 함께 공부해야 하니 농사일도 시키지 않는 것 때문에 아들은 4명의 여동생들에게 원망도 많이 들었습니다.

고3 아들이 대학 입시를 앞둔 84년, 평탄했던 우리 가족사에 작은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당신 건강을 돌볼 틈 없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위해 일하시던 어머니는 몸이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가벼운 병인 줄 알고 진찰을 받았지만 담당의사는 서울의 큰 병원에 가서 자세히 조직검사를 해봐야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연세대 세브란스에서 검사를 한 결과, 어머니는 직장암 판정을 받았고 4월에 수술을 했습니다. 아들은 그때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를 서울의 병원까지 모셔야 했고, 동생들까지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입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늘이 도왔는지 다행스럽게도 어머니의 수술 경과가 예상보다 빨리 호전되어 8월쯤에는 담당의사로부터 "괜찮다"는 소견을 들었습니다.

아들은 9월부터 놓았던 책을 다시 잡고 대학입시(당시는 학력고사) 준비를 했습니다. 학력고사까지 남은 기간은 3개월여. '과연 가능할까?' 걱정이 앞섰지만 마음을 모질게 먹었습니다. 독서실에서 2~3시간의 잠을 자고 집에 가서 아침을 먹고 도시락 2개를 챙겨 학교로, 다시 독서실로 향하는 말 그대로 강행군의 3개월을 보냈습니다.

그 결과 남들이 말하는 일류대학은 못 갔지만 그래도 서울 소재의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부모님이 바라던 대학은 아니었어도 아들이 어떻게 공부했는지를 옆에서 지켜보셨기에, 어머니는 합격 소식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기뻐해주셨습니다.

"공부하라고 대학 보냈더니 니가 어찌 그럴 수 있냐"

부모님께 기쁨을 드린 것은 딱 거기까지였던 것 같습니다. 어렵사리 입학한 대학에서 바라본 세상은 그동안 내가 배워서 알고 있던 사회와는 달랐습니다. 선배들을 통해서 사회의 모순을 알게 된 것입니다. 1학년 때 접한, 지금은 고인이 되신 문익환 목사님의 4·19혁명기념 초청강연과 5·18광주항쟁 영상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 목사님과는 인연은 그 뒤 수많은 통일행사에서 만난 목사님의 장남 고 문호근 선생님(2001년 작고)으로까지 이어졌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부모님 몰래 시작한 학생운동으로 아들은 수배자가 되었습니다. 87년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로 대학가가 한창 투쟁할 때입니다. 며칠 되지 않아 노량진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에게 연행되었고,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식구들은 제가 운동권이란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공부하라고 대학 보냈더니 니가 어찌 그럴 수 있냐! 누가 시켜서 했느냐?"

물론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께는 참으로 면목이 없었습니다. 영등포구치소에서의 생활로 남들 다 참여한 6·10민주화운동도 직접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4월 말에 연행, 구속 기소되어 7월 말이 되어서야 출소를 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6월민주화투쟁소식은 구치소 교도관을 통해 매일 같이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출소한 아들은 다시 복학을 했고 그 이후에도 학생운동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는 죄송스러웠지만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잠시 고민과 갈등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투쟁하러 가는 아들에게 "조심히 다녀와"... 마지막 인사

그런 아들의 결심과 어머니의 건강 악화는 불행히도 때를 같이했습니다. 아들의 수배와 투옥으로 인해 충격을 받으셨는지 87년 말에 어머니의 암이 재발하고 말았습니다. 1988년은 전국의 모든 대학들이 6·10학생회담과 8·15통일행사로 들썩거리던 때였습니다. 어머니는 연세대 세브란스 암센터에 입원해 재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고, 아들은 어머니 병실을 지키는 와중에도 낮에 집회가 있으면 6월 연세대 백양로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즈음 담당의사는 어머니가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알렸습니다.

"더 이상 치료가 불가하니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겠습니다"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남은 여생이나마 편안하게 해드리고자 6월 말에 어머니를 고향인 홍성의료원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아들은 1개월 반 동안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병실을 지켰습니다. 모든 것이 불충한 아들 때문인 것만 같아 뭐라 할 말이 없었고 가시는 그날까지만이라도 자식으로 도리를 다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홍성의 병원에서 어머니와 보내는 있었음에도 또 다시 마음은 서울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엄마, 저 서울에 잠시 좀 다녀오겠습니다."
"왜? 무슨 일로 가야하는데?"
"학교에 볼 일도 있고, 친구들에게 부탁할 일도 있어서요."
"무슨 일 있니? 그럼 몸 조심히 잘 갔다 와."
"예."

병실을 나서며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폐까지 전이된 암세포 때문에 기침을 끝없이 하시면서도 어머니는 아들이 걱정이 되었는지 되레 조심히 다녀오라십니다. 생전의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잡아본 손이었고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마음이 편치만은 않게 올라온 서울. 8·15 통일행사로 열기가 뜨거웠던 8월 12일 연세대 백양로, 노천극장에서의 집회와 교문에서 전경들과의 투쟁으로 그날 하루는 눈깜짝할 새에 흘러갔습니다. 하루해가 저물고 피곤한 몸으로 잠든 그날 새벽의 꿈은 몹시도 저를 불안하게 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아닐까?'

그 불길함을 아들은 확인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조금은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발길은 이미 홍성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용산시외버스터미널(현재는 남부터미널로 이전)로 갔는지...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홍성터미널에 내려 집으로 향하면서도 '아니야 살아 계실거야'라는 생각 뿐. '잘 다녀왔니?'하고 환한 얼굴로 아들을 반갑게 맞아주실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이미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열한 살짜리 막내 남동생이 맏상주 역할을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아들은 한스러움과 죄스러움에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장례를 치르는 3일 내내, 탈상하는 49제까지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 가시는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이 불효자를 꿈에서라도 만나주지 않으시려나요

평생 6남매 뒷바라지에 고생만 하시고 호강 한번 못해보신 채 두 차례나 암수술을 하신 어머니, 못난 아들 때문에 더욱 마음고생을 하셨습니다. 아버지 또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들은 지금도 아버지를 대하는 게 편하지 않습니다. 그런 아버지는 23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섯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재혼도 안하시고 일흔 여섯의 나이까지 홀로 살고 계십니다. 작년에 막내 아들을 마지막으로 모두 결혼시켰으니 참으로 자랑스럽고 존경스럽습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의 한은 지금까지도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습니다.
한번쯤은 어머니가 아들 꿈속에 나타날 줄 알았는데 23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머니는 단 한번도 꿈속에서조차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동생들은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났다고 하는데 이 아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질 못했습니다.

아직도 아들을 용서하지 않으셨나봅니다. 어머니를 꿈속에서라도 보고싶습니다. 추억이 담긴 소중한 얘기 꿈속에서라도 나누고 싶습니다. 어머니...

이렇게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들이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
모순덩어리 억압과 착취
저 붉은 태양에 녹아버리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덩실
해방의 거리로 달려가누나

아~ 우리의 승리
죽어간 동지의 뜨거운 눈물
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두려움없이 싸워나가리
어머님 해맑은 웃음의 그날 위해

덧붙이는 글 | '제가 제일 불효자입니다' 응모글


덧붙이는 글 '제가 제일 불효자입니다' 응모글
#어머니 #불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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