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놀고 있는 가을볕에 내다 넌 삶은 고추..
이명화
가을은 더 깊었다. 오늘도 가을볕은 놀고 있다. 놀고 있는 햇볕이 저 혼자 아깝다 아깝다 말한다. 탱탱 놀고 있는 가을볕이 정말 아깝다. 내 이웃에 놀고 있는 햇볕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바로 옆집 할머니다. 할머니는 허리 한 번 꼿꼿하게 펴고 걷는 걸 본 적이 없다. 활시위처럼 휘어진 꼬부랑 허리로 항상 팔팔하게 걸어 다닌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밭으로 나가거나 채소를 삶고 데치고 자르고 햇볕에 말린다. 봄·여름·가을 내내 그렇게 한다. 한 겨울이 되기 전까지 할머니는 뭐든 햇볕에 내다 덜고 거둬들이기를 반복한다.
호박을 썰어 널고, 고구마 줄기, 고춧잎, 고추, 아주까리 잎, 고사리 등 무엇이든 햇볕에 내다 널고 또 넌다. 계절 따라 햇볕에 널어 말리는 종류가 조금씩 다를 뿐, 매일 대문 밖 평상에도 길가에도, 할머니 현관 앞 볕이 잘 드는 장독대 주변에도 어김없이 뭔가 햇볕에 마르고 있다. 햇볕에 잘 말린 것들은 큰 고무 통에 보물처럼 봉지 봉지에 담아 보관해두었다가 가끔 구포 장에 갖고 나가 팔기도하고 겨울까지 두었다 팔기도 한다. 커다란 고무 통은 옆집 할머니의 보물 통이다.
옆집 할머니야 말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까워서 못사는 할머니 같다. 놀고 있는 햇볕에 뭐라도 널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오늘처럼 째지게 맑은 날이면 아침 산책을 하고 나서도 이따금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이다지도 가을볕이 좋은 날에 팽팽 놀고 있는 햇볕이 너무 아까워서 나라도 좀 말려야겠다는 듯이. 뭐라도 해야 할 것 만 같아서.
우린 오늘도 타성에 젖은 채로 아무 생각 없이 오늘 이 하루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째지게 좋은 날, '생명을 살리는 햇볕'은 오늘도 제 몫을 다하는데, 가을볕 아래 우리는 제 몫을 다하고 있는지.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놀고 있는 햇볕이 제가 아깝다 아깝다 소리친다. 뭐라도 끊임없이 살려 내는 하루가 되자. 젖어 있는 나라도 햇볕에 내어 말려 쓰자. 줄창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아깝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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