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있었다면 입학식에 왔을텐데..."

꿋꿋하게 자란 조카, 대학생이 됐습니다

등록 2012.03.05 09:27수정 2012.03.05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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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때 기자를 꿈꾸던 조카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월은 가속이 붙는다더니, 정녕 맞는 말 같다. 버거운 에움길 너덜겅 위로도 세월이 겅중겅중 잘도 걷고 성큼성큼 지나가서, 세월은 유수고 바람임을 다시금 실감시켜 준다. 

2005년 12월, 가운데 제수씨가 서른아홉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을 때 큰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리고 둘째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엄마를 잃은 후로 남매는 큰집에서 살았다. 큰아이는 중학생 시절 3년을 지내고,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도 주말에는 큰집에 와서 먹고 자고 했다. 그러다가 2009년 6월 할머니가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또 전이된 암세포에 의해 골반이 골절돼 서울 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과 태안의 요양병원에서 오래 병상생활을 하시게 된 사정에 따라 아빠가 집에서 따로 밥을 해먹게 되니, 녀석은 학교 기숙사에서 나와 집에서 아빠와 함께 생활했다.

녀석은 학교 기숙사가 오히려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말로 스스로 기숙사에서 나온 이유를 댔지만, 아무래도 집에서 혼자 살림을 하며 회사 출퇴근을 해야 하는 아빠의 가사를 조금이라도 도우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렇게 녀석은 고등학교 2학년 2학기부터 집에서 생활하며 공부를 했다.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저녁에는 아빠와 함께 큰집에 와서 밥을 먹으며 큰아버지와 큰엄마에게 대학진학과 관련하는 얘기를 하고, 자신의 수능 모의고사 성적을 보고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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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정문 앞에서 성균관대학교 기숙사 '지관' 출입문 앞에서 새내기 대힉생 조카 녀석과 기념촬영을 했다. ⓒ 지요하


한때 기자를 꿈꾸기도 했던 녀석은 고등학교 3학년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좀 더 '실리'에 눈을 돌려 '스포츠 과학'을 선택하고 성균관대학교 수시에 합격했다. 녀석은 성균관대학교 학생이 된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같은 고교 출신으로 농어촌지역 배정 점수에 의해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학생이 있는데(그래서 학교 정문은 물론이고 시내 곳곳에 축하 현수막이 걸렸다), 그 학생보다 자신의 수능 점수가 높았다며 그 사실에서도 자부심을 가진다.

녀석은 큰집에 오면 큰아버지가 읽는 <한겨레21>과 <시사IN> 등을 가져가기도 하고,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한 때 기자를 꿈꾸었던 것 같다. 알게 모르게 큰아버지의 영향도 많이 받았을 성싶고….

그런 녀석이 드디어 지난 2월 27일 성균관대학교 기숙사에 입소하고, 28일의 입학식과 함께 명실상부한 대학생이 됐다. 2005년 12월 엄마를 잃은 때로부터 어언 만 6년의 세월이 흘러서 녀석은 마침내 대학생이 된 것이다.              
   
<2> "엄마가 살아있다면 입학식에 왔을 텐데..."

지난달 27일, 수원에 있는 성균관대학교를 구경하고 왔다. 새내기 대학생이 된 조카 녀석 덕이었다. 다시 말해 조카 녀석을 성균관대학교 기숙사에 태워다주는 일을 큰아버지인 내가 맡아 하게 된 덕이었다.

그 일은 당연히 아버지가 해야 한다. 아버지가 없다면 모를까 엄연히 아버지가 있으니, 그 일은 분명히 아버지의 몫이다. 그럼에도 대학생이 된 녀석의 기숙사 짐을 차로 실어다 주는 일도 큰아버지인 내가 해야만 했다.

동생은 고난도 용접기술자다. 당진 화력발전소에 일거리가 밀려 있는 상황이다. 일용직이지만 일당이 요즘은 25∼30만 원 선이라고 한다. 높은 일당도 일당이지만, 팀을 짜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일손이 하나 빠지면 팀의 작업 능률에 큰 차질이 생긴다고 한다.

그 사실을 헤아려 이번에도 내가 조카 녀석의 기숙사 짐을 실어다 주는 일을 맡아 하기로 자청했다. 사실 지난 6년 동안 내가 동생을 대신한 일들이 많다. 녀석은 무슨 문제에 대해 아빠보다 큰아버지 큰엄마와 먼저 의논을 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이번 일 역시 자연스러운 일일 터였다.

내 승용차에 조카 녀석의 기숙사 짐을 싣고 녀석과 함께 성균관 대학교를 가는 일에는 지난달 14일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집에 내려와 있는 딸아이도 동행했다. 작은엄마의 그 빈자리를 사촌누나가 조금이라도 메워 주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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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1층 로비에서 새내기 대학생이 된 조카 녀석의 기숙사 짐을 내 차로 실어다주는 일을 마치고 나서 1층 로비에서 함께 포즈를 취했다. 초등학교 6년 시절 엄마를 잃은 후 큰집에서 생활한 조카 녀석이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으니 그저 대견스러울 뿐이다. ⓒ 지요하


기숙사 '지관(智館)' 6층에 있는 녀석의 방에 짐들을 들여놓아주고, 사진도 찍었다. 기숙사는 2인 1실이었다. 넉넉하고 쾌적한 분위기였다. 녀석이 산뜻한 기분으로 대학생활을 잘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기숙사 주차장에서 녀석과 헤어져 돌아오면서 다시금 6년 전에 세상을 뜬 제수씨 생각을 했다. "작은엄마가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아 하겠니!"라는 말이 절로 내 입에서 나왔다. 2002년이던가, 내 돈을 들여 제수씨를 운전학원에 다니게 했다. 그리고 면허증을 따게 했다. 그리고 틈틈이 내 차로 제수씨에게 실전 연습을 시켰다.

제수씨가 곧잘 운전을 하게 돼, 같은 연립에서 사는 제수씨에게 웬만한 일은 맡길 수가 있게 된 상황에서, 뜻밖에도 뇌혈관기형 뇌출혈로 쓰러진 제수씨를 그만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말았다.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뇌혈관기형 뇌출혈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와 동생의 '무지'가 통한의 아픔으로 가슴을 엔다.

"엄마가 살아 있다면 오늘 이렇게 녀석의 기숙사 짐을 실어다 주는 일도 엄마가 헐 거야. 당연히 내일 입학식에도 엄마가 올 테고…. 내일 입학식에는 우리가 다시 올 수 없으니, 녀석이 외롭게 쓸쓸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조금은 안쓰러워지는 마음으로 그런 말을 중얼거리자 딸아이가 위로를 해줬다. 

"다 컸는데 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성균관대학교의 입학식이 2월 28일 오전에 있다고 해서, 기숙사 짐을 실어다 주는 일을 28일로 하루 연기하려고 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 기숙사 짐을 방에 들여놓은 다음 입학식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할 마음이었다. 그런데 녀석은 며칠 전의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동기들과 27일 만나기로 약속했다며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약속'이라는 말에 각별한 느낌을 받았다. 녀석이 친구들과의 약속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이 남다른 신뢰심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3> 외로운 아빠를 보살피겠다는 녀석

돌아오는 길에 딸아이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줬다. 동생이 아들의 대학 등록금과 기숙사 비용을 합해 600여만 원을 지출했는데, 할머니의 걱정이 크신 것 같다는 딸아이의 말 때문에 꺼낸 이야기였다.      
          
2003년 3월, 내가 베트남 전쟁 고엽제 후유증 판정을 받아 국가유공자가 되면서 여러 가지 혜택을 보게 되니 한 가지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연 베트남 전장에서 고엽제에 노출되어 당뇨병을 갖게 된 것인지, 베트남 전쟁 고엽제와는 상관없이 무절제한 생활 탓에 당뇨를 갖게 된 것은 혹 아닌지, 실로 아리송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베트남 전쟁 고엽제와는 상관없이 내가 당뇨를 갖게 됐고, 또 그런 당뇨병으로 국가유공자가 됐다면 후일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갔을 때 적이 면구스러워지리라는 생각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다가 국가유공자 혜택을 나만 독식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그래서 국가유공자 7급 보훈연금 월 25만 원(당시)을 동생에게 나눠 주기로 했다. 두 동생 중에서 막내는 부부가 중등교사이므로 내가 신경 쓸 필요 없고, 가운데 동생은 고난도 용접기술로 높은 일당을 받지만 비정규직이라 퇴직 적림금도 없고 해서 그 동생에게 나눠 주기로 작정하고(집사람이 동의를 해주어서 감사하며) 두 조카아이 이름으로 500만 원 적금 통장을 두 개 만들어 매월 적금을 넣었다. 그렇게 해서 1천만 원을 만들어 내가 환갑을 먹던 2008년, 동생에게 아이들 대학 갈 때 학자금에 보태라고 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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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은편지 낭독 내 조카 녀석은 2008년 중3시절 충청남도에서 실시한 사은편지 공모애서 중등부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시상식 자리에서 앞에 나가 사은편지를 낭독하기도 했다. ⓒ 지요하


그런데 동생은 그 사실을 까맣게 잊었는지 아들의 등록금과 기숙사비로 600만 원이 나갔다며 생돈을 지출한 것처럼 말하니 나로서는 조금 아연하고 섭섭한 일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동생과 어머니께도 예의 그 1천만 원을 상기시키는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1천만 원을 미리 주지 말고(미리 달라고 해서 줬지만) 내가 가지고 있다가 지금 조카 녀석의 입학 등록금과 기숙사비로 쓰라고 주었더라면 생색도 나고 확실한 표도 나고 훨씬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카 녀석의 기숙사 짐을 내 차로 실어다 주는 일을 하고 난 후에도 동생에 대해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었다. 동생이 내게 형님 고생시켜 드려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는 하기를 바랐고, 자동차 기름 값은 얼마나 들었느냐고 묻기를 기대했다. 동생이 기름 값을 가져오면 받을 내가 아니지만, 아무리 형제간이라도 그런 인사 정도는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동생에게서 끝내 그런 인사가 없어서 하루는 중국 음식점으로 동생을 불러 저녁을 함께 하면서 섭섭한 말을 하기도 했다. 쉰 살이 넘은 동생을 가르치려는 것은 아닌가 싶어 미안하기도 했지만, 아들을 객지로 떠나보내고 더욱 적적하게 살아갈 동생을 위로하려는 자리이기도 했다.   

애틋한 마음만 더욱 컸다. 어떤 경우에도 애틋한 마음이 앞서거나 끼어들게 마련이었다. 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동생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금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아내를 잃고 홀아비로 살고 있는 세월이 벌써 7년 째였다. 그 사이에 아들 녀석이 훌쩍 자라 대학생이 됐지만, 동생은 별로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재미없이 사는 무미건조함 같은 것이 검게 그을린 주름살 사이에서 음울하게 얼비칠 뿐이었다.

다음날 조카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가 객지로 나게 살게 돼 아빠가 더욱 외롭고 적적할 테니, 전화라도 자주 걸어서 아빠를 위로해 드리라는 당부를 했다. 새내기 대학생 조카 녀석은 씩씩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게요. 큰아버지,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약속할 게요."

조카 녀석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동생이 그래도 저런 아들을 둔 것이 얼마나 다행이랴 싶었다. 저런 아들이 있기에 동생이 혼자 사는 가운데서도 매일같이 일터에 나아가 고난도 용접기술을 발휘하며 불꽃 속에서 하루하루를 불꽃같이 사는 것이리라. 그런 생각으로 다시금 나 자신을 위안하기도 했다.
#새내기 대학생 #성균관대학교 #대학교 기숙사 #스포츠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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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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