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나이에 여고생들에게 받은 단체 편지

큰 아이 슬비의 특별한 생일축하 편지를 받고

등록 2012.08.23 11:46수정 2012.08.23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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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딸 슬비와 예슬이가 만든,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생일케이크입니다. 직접 이런 저런 문양과 이름의 영문 이니셜까지 만들어 넣었습니다. ⓒ 이돈삼


오늘도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시간이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아침 6시 30분에 집을 나섰으니 17시간 넘게 밖에 있다가 돌아온 셈입니다. 그제야 하루종일 유지했던 긴장감이 풀립니다. 피로도 한꺼번에 몰려듭니다.


오늘따라 아이들이 더 반깁니다. 평소보다 더 많이 기다린 표정입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큰 아이 슬비가 손을 잡아끕니다. 그리고 소파에 앉히고 편지봉투를 내밀며 "생신 축하 편지예요"라고 합니다. 둘째 아이 예슬이도 편지를 내밉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저의 생일이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간 뒤 종일 잊고 지냈었습니다. 아이들이 편지를 써놓고 기다린 모양이었습니다. 더 반갑게 맞아준 것도 자정을 넘겨서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재촉하는 슬비의 편지를 먼저 읽어보았습니다.

슬비가 나름대로 준비한 '이벤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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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제게 써준 릴레이 편지입니다. 슬비 학교 친구들이 서너 줄씩 연이어 썼습니다. ⓒ 이돈삼


"슬비 아버님, 안녕하세요!! 저 슬비짝꿍 한승희라고 해요ㅎㅎ 생신 진심으로 축하드려요!!^o^" "안녕하세요. 저는 슬비 같은 반 친구 여원이라구 해요∼ 슬비집에 자주 갔었는데, 아버님은 못 뵌 것 같아요^.^ 생신 진심진심 매우매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슬비의 편지가 아니었습니다. "이거 네가 쓴 게 아닌데. 친구들이 쓴 거잖아"라고 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슬비를 쳐다봤습니다. 하지만 슬비는 "계속 읽어보세요"라고 했습니다. 나름대로 이벤트 편지를 쓰려고 친구들에게 축하편지를 부탁했고, 자기도 따로 썼다는 것입니다. 계속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슬비 아버님! 정은이에요. 저 아시져? 매번 여행갈 때 데려가 주셔서 감사해요∼ 다음번에도 잘 부탁드려요ㅎㅎ" 

여수엑스포 관람 등 몇 번 여행길에 동행했던 정은이의 편지였습니다. 다른 아이보다도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습니다. 은근슬쩍 저의 기분을 띄워 주는 글도 보였습니다. 아이들의 유머 감각도 엿보였습니다.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슬비 아버님 참 잘 생기신 것 같아요. 빈말 아니구 진심이에요" "꽃중년 다운 외모 잘 관리하시구요. 몸 건강하게! 하시는 일 모두 잘 되게! 즐거운 일만 가득하게!! 오래오래 예쁜 딸 슬비와 함께 사랑&애정 넘치는 생활하시길 바랄게요."

"슬비 동생을 본 적이 있는데, 슬비와 다르게 이쁘더라구요. 아버님을 닮았나봐요?!! 슬비하고도 사이좋게 지낼게요." "담배를 피우신다고 들었는데, 건강에 좋지 않으니 꼭 끊으시길 바랄게요. 저희 아빠도 피우시다 끊으셨는데 세상이 달라졌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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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비와 예슬이가 건네 준 생일축하 편지입니다. 봉투와 편지지를 함께 샀다고 했습니다. ⓒ 이돈삼


제법이었습니다. 여고생들의 생각이 이렇게 깊은가 싶었습니다. 밝고 명랑한 아이들의 편지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쉬는 시간마다 그 편지를 써달라고 하며 돌아다녔을 슬비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내용도 재미있었지만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은 저의 속마음까지 헤아려주었습니다. 어른스러웠습니다.

"슬비가 아버님 생신이라고 기특하게 이벤트하려나 봐요. 축하드려요∼ 슬비, 학교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열심히 하고 수업도 열심히 듣고 있으니까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아요." "생신 정말 축하드려요. 첫째 딸 슬비를 이렇게 잘 키우셨다니 참 대단해요!! 슬비 아버님께서 열심히 일하시는 만큼 슬비도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슬비랑 동아리에서 연습을 같이 하는데 그때마다 재밌고 마음도 잘 맞고 그래요. 슬비는 쾌활하고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볼 때마다 흐뭇??해요. 생신 특별하게 보내시길 바래요." "건강하시고 슬비랑 행복하고 아름답게 오래오래 사세요. 슬비처럼 미모의 여인을 착하게 잘 키우신 것 같아요. 슬비는 정말 효녀예요." "슬비 아버님 생신 축하드려요. 슬비를 낳아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선물을 받았네요."

슬비의 학교 친구 14명이 쓴 편지 가운데 일부분입니다. 난생처음으로 여고생들한테, 그것도 단체로 편지를 받아본 순간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난생처음 여고생들에게 단체 편지 받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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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딸 예슬이가 생일축하 케이크를 만들고 있습니다. 직접 크림을 짜고 문양을 만들어 넣고 있습니다. 함께 갔던 큰 아이 슬비가 찍어온 것입니다. ⓒ 이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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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비가 케이크를 만들고 있습니다. 초점이 조금 맞지 않는데요. 이것은 동생 예슬이가 찍어준 것이랍니다. ⓒ 이예슬


딸 아이 슬비와 예슬이는 전날 만들었던 케이크 이야기를 써 놓았습니다. 사실 둘은 지난 일요일 시내에 쇼핑하러 간다며 사이좋게 나가더니 '나만의 케이크'를 만들어 왔었습니다. 케이크를 만드는 집에서 직접 둘의 솜씨로 모양을 낸 것이었습니다. 얼굴도 그리고 이름의 영문 이니셜까지 새겨 왔었습니다.

두 딸의 편지는 케이크를 만들었던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놓았습니다. 멋있지 않았는지, 맛은 어땠는지, 감동은 받지 않았는지 등등. 아이들이 궁금한 점을 물어왔습니다. 자기들도 직접 케이크를 만들면서 '아빠가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니 뿌듯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갖고 싶은 선물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슬비는 "원하신다면 어떻게든지 마련해 보겠습니다"고 덧붙였습니다. 예슬이는 편지에 특별이용권 하나를 그려 놓았습니다. 이름하여 '이예슬 부려먹기 이용권'이었습니다. 횟수는 저의 나이만큼이며, 8월 말까지 다 써야 한다는 단서조항까지 붙여 놓았습니다.

이런 게 진정한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편지를 보면서 쌓였던 피로가 말끔히 날아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제 눈에는 아직 어린 아이들일 뿐인데, 부쩍 어른스러워졌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른들이 '딸 키우는 재미가 아들보다 훨씬 크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두 딸 아이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오래 전 생각에 혼자서 웃음을 지어보았습니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초등학교에 들어간다고 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고등학생이고 중학생이 됐습니다. 그것도 벌써 2학년입니다. 시간 참 빠릅니다. 두 아이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건강하게 그리고 해맑게 커갔으면 좋겠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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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딸 슬비와 예슬입니다. 8월 초 가족휴가 때 신안 비금도에서 후리질 체험을 하면서 잡은 숭어를 보고 기뻐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 이돈삼


#생일케이크 #릴레이편지 #이슬비 #이예슬 #문정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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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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