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눈이 오름 정상에서 파노라마로 찍은 모습이다.
조남희
용눈이 오름서 다짐했다... '제주도에 살아보자고'이전에도 다른 오름을 안 가본 것은 아니지만, 나의 첫사랑 오름은 지난 여름에 만난 용눈이오름이다. 지난여름에 나는 서울을 버리고 제주도로 떠나왔다. 수중에 가진 것 하나 없고, 연고도 없고, 집도 없고, 밥 벌어먹고 살 기술 하나 없는, '직장인 나부랭이'였던 내가 제주도에 살겠다고 굴러들어왔다.
희망과 기대? 물론 새로운 땅에서 그런 부푼 마음이 없으랴만은, 이주를 넘어 '이민'이라고까지 표현되는 제주도 정착을 할 수 있을지, 밤마다 심란함에 애꿎은 한라산(소주)만 잡아먹는 날들이었다.
사진작가 故 김영갑씨의 김영갑갤러리라는 곳이 있다. 그가 20년간 오름에 천착하며 찍어온 사진들을 종종 보면서도 좀처럼 오름에 가는 것은 미루고 있던 나였다. 그런데 어느날 생각해보니 김영갑씨도 따지고 보면 나와 같이 육지에서 온 '육지 것'이었다. 그런 그가 미쳐있던 오름이 대체 어떤지 직접 봐야겠다 싶었다.
그의 사진 중 상당수가 용눈이오름과 다랑쉬오름을 찍은 것이다. 나는 여기서 또 비겁하게 다랑쉬오름은 좀 힘들다 하니 우선 용눈이오름에 가기로 했다. 어쨌든 몸을 움직이는 걸 좀 귀찮아하는 나다.
용눈이오름에 처음 올라가던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마을을 벗어나 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인적없는 꼬불꼬불한 길을 찾아 들어가며, 눈 앞에 봉긋봉긋 솟아있는 오름들을 보면서, 여기가 제주도 맞아? 싶었다. 오름 정상에 올랐을 때, 가까이는 늠름하게 서 있는 다랑쉬 오름의 모습을 시작으로, 저 멀리 성산일출봉까지, 동서남북의 광경이 막힘없이 파노라마로 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제주라는 섬이 통째로, 날 것 그대로 삽시간에 내게 뛰어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때 '살자, 이 곳에서 살아보자'라고 결심했다. 그 오름들이 사시사철 변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봐야지 싶었다.
오름은 한라산에 오를 때처럼 등산장비를 갖추고 그야말로 마음먹고 가야하는 정복의 대상이 아닌 운동화를 신고 능선을 따라 터덜터덜 올라가도 되는 산이다. 그렇게 부담없이 용눈이오름에 오르다 보면 나는 어느새 토닥토닥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아 마음이 아플 때, 그립고 생각나는 이가 있을 때 나는 등산장비를 챙기고 싶지는 않다. 마음도 힘든데 몸까지 힘들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금세 정상에 퍼질러 누워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이소라의 노래 '바람이 분다'를 들으면서 잠시 옛 기억에 빠질 수 있는 용눈이오름을 찾는다.
눈 앞에 펼쳐지는 믿을 수 없이 시원스런 광경을 보며 그저 흘려보내자고 속삭이고 만다. 용눈이오름은, 속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눈물을 보여도 탓하지 않고 조용히 들어주는 친구 같은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