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세 넘도록 계속 일할 수 있는 건 동료들의 배려 덕"

[인터뷰] 50여년 동안 의료인으로 살아온 홍인표씨

등록 2013.01.30 16:47수정 2013.01.3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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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화려한(?) 이력서는 난생 처음 봤다. 빼꼭히 채운 학력 및 경력사항은 두 장을 거뜬히 넘긴다. 1939년생,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파란만장한 인생살이를 엿볼 수 있듯 그의 이력서에는 고스란히 삶의 발자취가 녹아내려져 있다. 지난 23일 군산 의료계의 살아있는 전설, 홍인표(74·군산시 개정동)씨를 동군산병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기자양반, 내 얘기 다 들으려면 하루는 꼬박 걸릴 거요. 몇 시간 내에 끝내긴 어렵지. 일단 지금까지 정리한 자료집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 것이오."

a 홍인표씨 올해 나이 74세. 그러나 그는 여전히 현역 의료인이다

홍인표씨 올해 나이 74세. 그러나 그는 여전히 현역 의료인이다 ⓒ 박영미


쩌렁쩌렁한 말투며 다부진 체격, 그의 첫 인상은 흡사 군인 아니면 체육인처럼 다부져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해병대(1957~1960년) 출신인 그는 아직도 군인 정신이 마음 속에 서려있는 듯 자료집 첫 페이지에 정리된 해병대 사진이며 자료들을 소개했다. 해병대의 용맹스러움은 익히 알고 있는 터, 그러나 60년대 해병대 이야기는 낯선 풍경처럼 그저 신기했다.

a 자료집1 해병대 관련하여 질서정연에게 정리해 놨다

자료집1 해병대 관련하여 질서정연에게 정리해 놨다 ⓒ 박영미


"철모르고 군대 가서 죽으라고 고생했지. 고생한 만큼 추억도 깊어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가 보네. 본격적으로 병원생활을 한 건 제대 후 일 거요. 나를 병원으로 이끈 분은 한국의 슈바이처 쌍천 이영춘 박사님이시지."

처음부터 병원 일에 뜻을 둔 건 아니었다. 갓 제대 후 고향에 내려와 그는 너무도 당연하게 부모님 농사일을 도왔다. 때마침 그때 가까운 이웃으로 홍인표씨의 아버지와도 잘 아셨던 이영춘 박사는 개정병원을 설립했고 일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하던 차에 소식을 듣고 그를 부른 것이다.

"1962년 6월 21일, 내가 23살 되던 해였지. 이영춘 박사님은 그냥 날 보고는 '내일부터 병원으로 와'라고 한 마디 하셨는데 그때부터 나의 병원생활이 시작된 거야. 간혹 박사님은 어떤 분이셨냐고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내가 본 박사님은 굉장히 무뚝뚝한 분이셨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박사님은 항상 표정의 변화가 없으시고 한결 같으셨어. 크게 웃으시거나 크게 화내시는 걸 본 적이 없으니…. 병원에서 근무한지 몇 년 지났을까. 어느 날은 나한테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아직도 기억이 나. '너는 봉사정신이 투철하니 어디 가서든 잘 할 거다'고. 그게 내가 들은 최고의 칭찬이 아닐까 생각해."


a 자료집2 이영춘 박사와 함께 일하던 개정병원 모습 등 관련 자료, 사진, 기사들을 모조리 수집해 놨다.

자료집2 이영춘 박사와 함께 일하던 개정병원 모습 등 관련 자료, 사진, 기사들을 모조리 수집해 놨다. ⓒ 박영미


이영춘 박사를 도우며 자연스럽게 병원 일을 익힌 그는 틈틈이 영어공부며 의학용어를 익혔고 모르는 일은 박사님께 물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을까. 어느 날 이영춘 박사가 그를 불렀다. 그리곤 병원에 파견된 유니세프 직원들이 사용하던 자전거를 주고는 한마디 하셨다.

"오늘부터 너는 병원 끝나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어떻게 사는지 조사해 와."


그때부터 그는 개정면을 포함한 옥구군을 돌며 호구조사를 했다. 말이 좋아 호구조사지 동네사람들 숟가락 개수까지 셌다. 그렇게 몇 날 밤을 새워 통계 자료를 만들고 문서를 꾸몄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전신격인 '옥구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이었다.

병원 일에 익숙해질 무렵, 그는 본격적으로 의료인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간호대학을 가기로 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간호사는 여자가 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도 난감함을 표했다. 간호대학에서도 남학생을 받아들이는 게 처음이었고 선례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스스로 간호대학을 포기했다. 그리곤 나날이 커가는 자녀들(2남1녀)을 키우기 위해 타국생활을 시작했다.

"1978년부터는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고 할 수 있지. 내가 산업 비자를 받아 여권만 5개 소지하고 있어. 첫 번째는 1978년 현대건설(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 SNOS) 의무실장부터 시작했지. 1005여 명이 되는 사원들을 의료원 3명이서 돌봐야 했지. 그리곤 1년 후 귀국했는데 이영춘 박사님이 다시 부르셔 개정병원에서 일을 했어. 하지만 1980년도 이영춘 박사님이 돌아가신 후 다시 해외로 나가게 된 거야. 1983년 정우개발(사우디아라비아 킹화이잘 병원 현장), 1985년 삼성건설(이라크 바그다드 요시도로 공사 현장), 1988년 대우건설(리비아 뱅가지 중앙병원 현장), 1990년 동아건설(리비아 배수로관공장 현장) 등 해외 개발 현장을 돌아다니다 1992년 나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거지."

a 자료집3 해외산업기지에서 의무실장으로 일하던 사진 역시 꼼꼼하게 정리해 놨다

자료집3 해외산업기지에서 의무실장으로 일하던 사진 역시 꼼꼼하게 정리해 놨다 ⓒ 박영미


그때 그의 나이 53세. 오랜 기간 쉬지 않고 일만 했던 그에게 어쩌면 쉬는 일이 더 간혹한 일일지 모르겠다. 적지 않은 나이에 군산 소재 병원에 다시 입사한 그는 1982년도에 취득한 간호조무사 자격증으로 병원 일을 계속했다.

이영춘 박사 곁에서 18년을 일하고 해외 산업기지 현장에서 무수히 많은 환자를 돌보며 다양한 의료경력을 갖고 있는 그이지만 직분을 가리지 않고 병원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곤 지금의 동군산병원까지 무려 50년 7개월 9일째 의료인의 한 사람으로서 여전히 현역으로 '병원 사원증'을 달고 있다.

"70세가 넘도록 의료직을 계속할 수 있는 건, 같이 일하는 직원들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나 생각해. 언제까지 계속할진 모르겠지만, 항상 뜨거운 열정으로 환자들을 돌보고 싶어. 돌이켜보면 이 일이 나의 천직이지 않나 생각해. 오늘밤은 이 길로 이끌어준 이영춘 박사님이 더욱더 생각날 듯하네." 

그야말로 군산 의료계의 살아있는 전설, 홍인표씨는 재작년 가장 오랜 기간 병원에 근무한 인물로 군산기네스에 등재됐다.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닌 역사라 말할 수 있는 '50년 7개월 9일'. 그저 기네스 그리고 전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서해타임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홍인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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