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솥에 목욕물 데우는 집, 살 수 있을까

[서울처녀 제주착륙기 12] 제주에서 이사하기

등록 2013.02.12 18:45수정 2013.03.18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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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간(新舊間)'을 결국 놓쳤다. 제주사람들처럼 가급적 신구간에 이사하려고 했지만 결국 이사 갈 집을 못 구한 것이다. 제주에서 신구간은 대한 후 5일에서 입춘 전 3일 사이로 보통 일주일이다. 이른바 신구세관이 교대하는 과도기간으로, 지상의 모든 신이 하늘에 올라가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고 내려오기까지의 공백기간이다.


예부터 제주에서는 이 기간에 이사를 비롯해 부엌·문·변소·외양간 고치기, 집수리, 울타리·돌담 고치기, 나무 베기, 묘소 수축 등 다양한 일을 해왔다. 이 기간에 이런 일들을 하면 동티(화)를 막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도시화된 제주에서는 주로 이사가 큰일이 돼 지금도 신구간에는 이사 행렬이 줄을 잇는다. 한마디로 신들이 지상을 떠나 있는 동안 쓱싹 일을 치르는 것이다.

1만8천에 달하는 신들이 산다는 곳, 무속신앙이 강하게 남아있는 제주이기에 이런 풍속이 지금도 존재한다. 나는 비록 서울에서 굴러들어왔지만, 이런 도민들의 풍속을 따른다고 해서 흉 될 일은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신구간 전에 이사할 집을 구하고 기간 안에 이사를 하려 했건만... 이제 제주 목관아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던 입춘굿마저 성대하게 끝이 났다. 새로 임무를 부여받은 신들이 죄다 내려와 버렸을 테고, 나의 이사는 신들 모르게 쓱싹 끝내기엔 '텄다'.    

서귀포 대평리에 집이 있긴 하지만, 당분간 하게 될 일이 저 멀리 세화리·성산 일출봉 쪽에 생긴 터라 그쪽에 연세 집을 하나 더 구해보려고 했다. 대평리에서 성산까지는 50km가 넘는다. 출퇴근을 하자니 기름값도 무섭고 일도 늦게 끝나는 터라 집을 구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돌집에서 살기, 제 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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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좌읍 세화리의 밭담. ⓒ 조남희


내가 생각한 집의 조건은 별다른 게 없다. 제주의 일반적인 돌집(농가 주택)일 것 그리고 싸야 한다는 것. 연세 150만 원 전후로 말이다.

돌집을 원하는 이유는 텃밭 때문이었다. 지금 대평리 집은 텃밭이 없다. 도시 사람이 제주에 내려와 산다고 했을 때, 제주 전통 농가 주택인 돌집에 살아보고 싶은 것은 하나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다.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일인 것이다. 집 곁에 있는 텃밭에 상추와 각종 채소를 심어 가꾸고,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것. 딱 그게 하고 싶었다. 민트를 심어 내가 좋아하는 칵테일 모히토를 수시로 말아먹겠다는 속셈도 숨어있었다.

그러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구좌읍 하도리에 빈 농가 주택이 있다기에 득달같이 달려가 봤다. 하도리동동. 마을 이름도 참 예쁘다. 역사가 살아있는 구좌읍이기에 더욱 좋았다. 게다가 편리한 농가주택 생활의 관건인 화장실이 실내에 있다고 해서 기대는 더욱 부풀었다.

그 집은 버스정류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마을 초입에 있는 돌집이었다. 오래된 티가 났지만 제법 튼튼해 보였다. 집 한쪽에는 텃밭이 꽤 넓게 있었는데, 살포시 쌓여있는 눈들로 인해 텃밭은 더 파릇파릇한 싱그러움을 내뿜으며 나를 유혹했다. 집 내부를 들여다보려 했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집 뒤로 돌아가 보니 문이 또 하나 있었는데, 이 또한 잠겨 있는 듯했다.

"못 들어가겠는데요? 포기해야 겠다. 나중에 다시 와야 하나?"
"잠깐만요. 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일행이 조금 힘을 쓰자 당황스럽게도 문은 금세 들려졌다. 잠긴 게 아니라 얹혀져 있었던 것이다. 이래도 되나 하면서 안에 들어갔다. 크지 않은 방이 세 칸. 오래된 티는 나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부엌과 화장실이라 할만한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로 추정되는 곳은 역시 바깥에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이게 뭐하던 곳인지 알 수 없는, 돌로 담이 쳐진 공간. 생각해보니 통시다. 꿀꿀, 도새기(돼지)가 있었겠구나. 

두 개의 가마솥에 든 생각... '이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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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문을 열자 눈에 가마솥부터 들어왔다. ⓒ 조남희


별채를 열어보니 부엌살림과 커다란 가마솥이 두 개 있었다. 아... 내가 극복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싶었다. 봄이 되면 잠시 내려와 있기로 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도 우리가 살 집에 대해 기대에 부풀어 있던 참이었다. 방송일을 하는 그 친구는 가마솥의 존재에 놀라워했다.

"응, 여기 가마솥이 두 개나 있어. 사진 봤지?"
"내가 그렇게 섭외하기 힘들었던 가마솥이 왜 거기 그렇게 쉽게 있는 거냐..."

밥은 전기밥통이 알아서 해준다지만, 화장실이 밖에 있는 불편함과 여차하면 가마솥에 물 데워 목욕할 생각을 하니 눈물을 머금고 파릇파릇한 텃밭을 뒤로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은 돌집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당분간 포기하기로 하고,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원룸을 구해 들어가로 했는데, 그것도 집주인이 다시 연세를 올려달라는 바람에 어쩔 수 없게 됐다.

도시에서 제주로 이주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직접 집을 짓거나 기존의 집을 빌려 개축할 능력이 없는 경우 원하는 조건의 주거 환경을 이루고 살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제주 도심의 아파트나 비싼 원룸에 들어가 살자니 그럴 거면 뭣 하러 제주도까지 내려와 사나 싶은 것이다.

수고 끝에 괜찮은 조건의 농가 주택을 구한다고 해도, 혼자 몸으로 연고도 없는 시골 마을에 둥지를 틀고 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나야 사실 무턱대고 그렇게 하고 있지만 말이다.

"인간에겐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당신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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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설이 남아있는 따라비오름에서. ⓒ 조남희


종종 연락하고 지내는 이주민 처자의 경우도 그렇다. 며칠 전에도 전화가 와서 "외롭고 힘들어서 육지로 돌아가고 싶다, 서귀포로 이사 가고 싶은데 혼자라서 무섭다"고 했다. 나는 "너무 성급하게 결론짓지 말고 조만간 만나서 얘기를 해보자, 같이 재미있는 일을 찾아보자"고 답한 뒤 수화기를 내렸다. 사실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이런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라고 하게 되는 것은, 동병상련의 마음에 더해 전우를 하나 잃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때문이다.

제주에 와서 좌충우돌 하고 있는 낯 모르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건씩 메일을 보내 '힘들다' '외롭다' '만나서 얘기라도 하자'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부류는 '나도 너처럼 내려가고 싶다'는 이야기들.

박민규 단편소설집 <카스테라> 중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에는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라는 주인공의 독백이 담겨 있다. "인생에서 무엇을 더하고 뺄 것인가의 문제, 그걸 말하는 게 아닐까"라고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소설을 읽어주면서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집을 구하면서 나는 내 인생에 텃밭을 가꿀 수 있는 집을 더하고 싶었지만, 가마솥과 밖에 있는 화장실마저 더할 수는 없었기에 당분간 텃밭을 가꾸는 삶을 포기하는 산수를 했다.

그전에 내 인생에서 행한 작지 않은 산수는 제주에서의 좋은 환경과 마음의 여유를 더하기 위해 도시에서의 안정된 직장과 수입, 편리한 생활을 빼는 것이었다. 어느 것이 덧셈이고 어느 것이 뺄셈이 되는지는 지극히 내 개인의 영역이다.

그래서 제주에 살러 오겠다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각자 자기 인생의 산수를 하는 것이니 말이다. 나와 같은 산수를 해서 제주도에 내려오는 경우에도, 모든 것이 덧셈이 되지는 않는다. 1년 살 집 한 칸 구하는 일, 외로움 등의 복병이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다.

신구간이 지나 이사 시기를 놓치긴 했지만, 그래도 싸고 방이 넉넉한 집을 구하는 걸 포기하지는 말아야 겠다. '가마솥과 밖에 있는 화장실이라는 마이너스를, 제주가 좋아 내려온 사람들이 조금 덜 외로워질 수 있는 공간, 지역 사회에도 도움이 되고 재미있는 일을 도모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면, 더 큰 덧셈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텃밭은 덤이 될 터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제주에 있는 지상의 신들도 이런 이사라면 조금은 눈감아 주지 않을까. 화장실이 밖에 있고 가마솥에 목욕물을 데워야 했던 그 집은 아직 남아있는지 궁금해진다.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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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는 서울처녀,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http://blog.naver.com/hit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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