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슬>을 3만 명 이상 봐야하는 이유

[서울처녀 제주착륙기 13] 제주 4·3사건 소재한 '사람이야기'

등록 2013.03.01 21:46수정 2013.03.18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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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국제공항을 빠져나오면 한라산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날 날씨에 따라 한라산이 잘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선명한 한라산을 볼 수 있다면 삼대가 복을 쌓은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는다. 그만큼 제주의 날씨가 변화무쌍하다는 이야기다. 그날은 날씨가 흐린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한라산이 아주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제주 4·3사건 소재로 한 영화 <지슬>, 포스터 직접 가지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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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슬>의 포스터 ⓒ 자파리필름

25일 서귀포 대평리에 있는 집으로 바로 가기도 아쉽고 해서 제주시에 있는 간드락 소극장에 들러 영화 <지슬> 포스터를 가지러 가기로 했다.

3월 1일 제주에서 먼저 개봉하는 영화 <지슬>은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로 최근 선댄스 영화제, 브졸 영화제 등 여러 권위있는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바 있다.

얼마되지 않는 제작 예산도 부족해서 빚을 내고 스태프들이 고생했던 이 영화, 홍보를 위해 뿌릴 돈이 있을 리 만무한 것을 알기에, 포스터를 받아다가 우리 동네 전신주에라도 붙일 요량에서였다.

극장 앞에 왜 이렇게 주차할 공간이 없나 봤더니 도내 방송국, 신문사 차량들이 가득했다. 간드락 소극장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님, 언론사 차량이 왜 이렇게 많아요?"
"오늘 <지슬> 기자 간담회 있잖아, 너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냐?"


아닌데. 어쨌든 나도 시민기자니까 상관은 없겠지 싶어서 기자간담회가 열린 곳으로 슬쩍 들어갔다. <지슬> 감독인 오멸 감독과 고혁진 프로듀서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지슬>은 이념을 다룬 게 아니다. 4·3은 사람의 이야기로 보는 게 중요하다."  
"어떤 데서는 아직도 4·3을 두고 폭도다 빨갱이다 폄하하는 표현을 한다. 중요한 건 밭 일구고 바다에서 일하던 순박한 사람들이 죄 없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3만 명 이상이 4·3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숫자만큼은 알려야 한다는 숙제가 있다. 그 숫자만큼은 보게 해야 한다는 것이 작품의 취지였다. 3주간 1만 명, 두 달 동안 3만 명이 목표다. 우리나라의 독립영화 현장에서는 불가능한 수치다. 지방에서 독립영화 관객이 1만 명을 넘는다면 영화적 사건이 되고,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게 되면 사회적 사건이 될 것이다. 이는 4·3을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제영화제 수상을 위해 장기간 출국에 서울 나들이로, 오멸 감독은 인터뷰 내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화를 제작하는 동안에는 제작비 마련으로 마음 고생이 심했을 텐데, 수상 후에야 뒤늦게 쏟아지는 관심들, 날마다 줄을 잇는 인터뷰로 피곤할 만도 하다. 그럼에도 가끔씩 미소와 함께 섞여 나오는 제주 말이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들렸다.

영화 <지슬>의 중심이야기가 4·3 사건 당시 큰넓궤동굴로 피신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오멸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4·3에서 '사람'을 보아달라고 하는 것이 결코 공허한 주문이 아닌 것은, 현재도 그것이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며칠 전 경기도에서 '경기도현대사'라는 공무원교육교재를 발간하여 활용한다고 했는데… '경기도현대사'는 4·3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제주도 공산주의 세력이 대한민국의 건국에 저항하여 일으킨 무장 반란이었다."

여기엔 사람은 온데간데 없고, 사건만 있다. 당시 죽은 사람이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 공식집계상 3만 명 이상인데, 그 분들은 이 문장 중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제주 4·3 사건 당시 공식집계상 3만 명 이상 죽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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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공원 전시실 끝도 없이 올라가는 사망자명단에 노인과 아기가 눈에 들어온다. 오른 쪽 판넬에는 '희생자의 33%는 노약자와 여성'이라는 설명이 보인다. ⓒ 조남희


4·3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는 아래와 같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함"('4·3특별법' 제2조)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열린 3.1절 기념집회 후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젖먹이 어린애를 업은 여인과 국민학교 학생을 포함 6명의 사망자와 8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사건. 기마 경관이 자신의 말에 깔린 어린애를 그대로 방치한 채 지나가자 분노한 군중이 돌팔매를 가했고 총격이 시작됐다.)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함.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2003년 10월 정부채택보고서) 536쪽)

'경기도현대사'를 만든 이들 그리고 이를 묵인한 이들이 영화 <지슬>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3월 21일 서울에서 개봉이니, 어려운 공무원 교육교재 만드시느라 지친 심신을 영화로 달래보는 것은 어떨지. 경기도 공무원들에게 <지슬> 단체관람을 하게 하는 것도 교육 효과가 좋을 것이다. 간담회 중 오멸 감독이 한 다음과 같은 말도 생각해보면서 말이다.

"우리의 통증을 안으로부터 어떻게 바라보고, 재인식하는가가 중요하다. 우리가 올바르게 사건을 정리하고 이해하고 기록하고 있어야 한다. 4·3을 좀 더 보편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긴장의 해체가 필요하다."  

누군가 진실을 가리고, 거기서 '사람'을 빼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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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일손지묘 깨진 비석 4.3사건 당시 섯알오름에서 학살당한 이들의 132기의 무덤에 유족회가 1959년에 세운 비석이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박살나고 강제철거되었다가 1999년 유족회가 다시 꺼내 전시했다. ⓒ 서명숙


그날, 누군가 진실을 가리고 거기서 '사람'을 빼려고 해도, 그럴 수 없다는 듯이 흐린 날이라도 한라산은 거기 서 있었다.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말이다. 간담회가 끝나고 <지슬>의 포스터를 들고 나오면서, 내 뒷꼭지에 대고 간드락 소극장 대표님이 말을 던졌다.

"대평리는 니가 책임져라!" 

그럴 능력은 없지만, 아는 도민은 총동원해야겠다. 관객 3만 명 달성을 위해서.
#제주도 #지슬 #오멸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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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는 서울처녀,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http://blog.naver.com/hit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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