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에게는 이런 가방이 어울려요." 판매의 달인들은 고객의 취향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김지현
판매의 달인, 혜수 언니는 더 나아가 손님들의 취향까지 파악했다. 처음 온 손님의 복장을 보고는 "고객님은 이런 옷을 좋아하시겠네요", "고객님에게는 이런 가방이 어울려요"라면서 상품을 추천했다. 언니는 기억력도 좋았다. "OO엄마, 지난 여름에 그 옷 사갔잖아, OO엄마 취향으로는 이 옷을 좋아하겠네"라며 1년 전 고객이 구입한 제품까지 기억해내 그의 취향을 파악했다. 이러니 고객들이 안 사고 배기겠는가.
몇 달 후 나는 대기업 생활용품 대리점에서 또 다른 판매의 고수와 일한 적이 있었다. 30대 초반인 보라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백화점에서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려다가 매장 매니저의 "잘한다"는 칭찬에 아예 눌러앉아 10년 넘게 일한 베테랑. 보라는 한 고객에게 하루에 2000만 원 넘게 판 적도 있다는 등 백화점에서 일할 때의 무용담들을 들려줬다.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정도로 그의 판매 기술은 남달랐다.
생활용품 대리점은 500원짜리 병따개부터 30만 원대의 이불까지를 팔았다. 하지만 30만 원짜리 이불을 사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전단지에 실린 초특가 제품들을 주로 찾아서 고객 1명이 사는 평균 구입액을 뜻하는 객단가가 2~3만 원을 넘기 힘들었다. 그런데 보라는 그중에서도 구매력이 있는 고객을 잘 찾아냈다. 그런 고객은 옆에 붙어서 여러 제품들을 추천해 70~80만 원씩 사게 만들었다. 더 놀라운 건 그가 추천하는 제품들이 꼭 비싼 것들이 아니었다는 거다. 고객이 필요로 할 것 같은 제품들만 권하는 재주가 보라에게는 있었다.
무슨 일이든 10년 넘게 꾸준히 하면 일가를 이룬다고 하던데 두 사람이 딱 그 짝이었다. 하지만 일가를 이룬 두 사람도 오지 않는 손님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뉴스에서 '불황'이라더니 손님들이 너무 없었다. 그저 세일 때만 붐볐다(그래서 백화점이고, 생활용품 대리점이고 세일을 주구장창 하는지도 모른다).
매장을 열고 오후 늦도록 손님이 안 오는 날들이 있었다. 편히 쉬어도 되는데 이들 '판매의 달인'들은 결코 쉬지 않았다. 혜수 언니는 기분 전환한다고 마대 걸레로 매장을 구석구석 닦아냈다. 진열대도 박박 걸레질했다. 보라는 아예 진열대를 뒤집었다. 이쪽에 있던 그릇을 저쪽 조리기구와 바꾸는 식으로 매장 배치를 바꿨다. 때가 돼서 온 것일 수도 있지만 신기하게도 두 사람이 그렇게 하고 나면 손님이 들어왔다.
나는 두 사람이 유별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백화점 직원 휴게실에 있으면 매출을 걱정하는 이들의 대화가 심심치 않게 오갔다.
"지혜야, 왜 이렇게 맥아리가 없어?" "저요? 매출이 안 나와서요.""나도 장사 잘해서 칭찬 받으면서 일하고 싶어." "이번 달은 700(만 원)을 맞춰 줘야해. 그래야 보너스가 나온대. 직영이 원래 그래. 대놓고 재고 쌓고 있어. 손님이 없는 걸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고…."매출 목표가 떨어지는 곳은 그 액수를 맞추기 위해 피를 말렸다. 매출 압박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 곳이라도 매출에서 내 월급이 나오니 매출액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왜 자꾸 얼마 팔았나를 전산에서 확인하나 했는데 나중에는 나도 시시때때로 판매액을 살폈다.
"자살한 백화점 판매원 심정 이해돼"보라와 함께 일하던 중 한 판매원이 자신이 일하던 백화점에서 떨어져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소식을 전하니 보라는 "그 언니가 술을 안 마셨나 보다"라고 지나치듯 말하고 말았다. 자신은 술로 스트레스를 풀었다면서…. 며칠 후, 보라가 다시 그 사건을 언급하면서 백화점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하루하루가 행복하지가 않아.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아무도 안 들어오다가 폐점시간 다돼서 손님이 오는 경우가 있어. 그럴 때는 그냥 창고에 들어가서 술 마시고 싶어. 매출 좋은 날 잠깐 기분 좋고,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야. 자살한 그 사람은 그런 자기 심정을 이기지 못했을 거야."보라는 자신도 백화점에 계속 있었으면 제 명에 못 살았을 거라고 전했다. 보라가 백화점 판매원들이 느끼는 매출 압박과 관련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줬다. 백화점에서 일하던 어느 날, 출근을 해보니 건너편 매장에서 이상한 연기가 올라오더란다. 가서 보니 그 매장 매니저가 향을 피운 채 물 담긴 사발을 앞에 두고 절을 하고 있었다고.
"'언니, 뭐하고 있어요?'라고 물었다가 부정 탄다고 저리 가라고 손짓을 막 하더라고."보라 역시 단골 점집이 있었단다. 계절 바뀔 때마다 가서 부적을 받아왔다고 한다. 한 번은 점집 보살이 보라가 일하던 백화점 매장에 막걸리를 뿌리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냄새가 날 걸 알면서도 매장에 막거리를 뿌리기도 했단다. 보살이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다'고 해서 보라는 매장 동생들을 다 내보낸 뒤 절을 하고 막걸리를 뿌렸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