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시설... 분당은 안 되고, 밀양은 왜 될까

집단 민원에 대처하는 정부의 원칙, 그때 그때 참 다르네요

등록 2013.09.11 17:43수정 2013.09.1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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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보호관찰소 성남지소를 성남 분당구의 도심 건물로 기습 이전하려던 계획이 주민들의 격렬한 반발로 무산될 처지에 놓였다. 지난 9일 법무부가 원점 재검토 방침을 밝힌 것이다. 국가기관이 주민의 의사를 수렴하고 양해를 구하는 등의 최소한의 절차나 원칙도 없이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다 화를 자초한 측면이 크다.

그런데, 법무부의 '투항' 소식을 접하노라니 9년째 송전탑 공사 문제로 갈등을 벌이고 있는 경남 밀양의 어르신들이 문득 떠올랐다. "왜 분당은 되고, 밀양은 안 될까?" 거칠게 말해서, 주민들이 반대하는 혐오시설인 것도 비슷하고, 정부가 지역이기주의라고 몰아붙인 것도 같은데 법무부의 대응과 결론은 왜 다르냐는 의문이 든 것이다.

똑같은 혐오시설, 분단은 되고 밀양은 왜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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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보호관찰소 기습 이전, '주민 반발' 성남보호관찰소 이전 반대를 위한 분당학부모비상대책위원회 소속 학부모들이 9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성남보호관찰소 앞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며 관찰소 직원들의 출근을 저지하고 있다. 이날 이들은 "성남보호관찰소가 주민들의 반발을 의식해 지난 4일 새벽에 기습 이전했다"며 "학교와 주민 시설이 없는 곳으로 이전하라"고 요구했다. ⓒ 유성호


이명박 정부에서 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입만 열면 법과 원칙을 강조하며 집단 민원에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누누이 밝힌 터다. 분당과 밀양의 지역이기주의를 단순 비교해보면, 정부의 법과 원칙은 '그때그때 달라요'인 셈이다. 정부가 불과 몇 일만에 백기를 든 분당과 9년째 폭력을 휘둘러온 밀양, 두 곳의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선, 농성을 주도한 이들이 분당에서는 30~40대 젊은 여성들이라면, 밀양은 70~80대 어르신들이라는 점이 다르다. 분당 주민들이 '아이들의 안전'을 문제 삼고 있다면, 밀양은 '어르신들의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점도 다르다. '지금 이대로만 농사짓고 살다 가게 해 달라'는 어르신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못해 바보스럽기까지 하다.

차이는 또 있다. 분당에서는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시위를 벌이는 주민들 편에 서서 발 빠르게 정부를 압박한 데 반해, 밀양에서는 정치인들이 어르신들의 편에 서기는커녕 정부와 주민들 사이에서 '대화와 타협'만 되뇌며 9년째 허둥대고 있는 실정이다. 늘 그래왔듯, 정치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주민들의 '삶'보다는 그들의 '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곳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지역' 그 자체다. 분당과 밀양. 우리 사회에서 그것이면 충분하다. 정부의 대응과 결론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다. 고소득 중산층이 모여 사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부촌 분당과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인근 도시로 모두 떠나 고령화한 밀양의 차이는 확연하다.


수도권의 대도시와 지방의 소도시. 인구수와 1인당 소득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령 인구 비율부터 성비에 이르기까지 두 지역의 차이는 극과 극이다. 굳이 같은 게 있다면 두 곳 모두 여당인 새누리당의 표밭이라는 점뿐이다. 그런데, 이번 일로 '천당 아래' 분당의 주민들과 시골 밀양 촌로들의 정부가 매긴 '몸값' 역시 천양지차라는 사실이 여실히 증명됐다. 아무리 목 놓아 외쳐도 정부가 관심을 갖고 들어주는 동네는 따로 있다고나 할까.

언뜻 보면 사소한 이번 일은 지역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과 철저히 파편화한 우리 사회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수도권 등 대도시 주민들을 위해 농어촌 주민들의 희생을 우리는 너무도 당연시한다. 전가의 보도처럼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강조하며, 밀양의 어르신들은 졸지에 '나쁜 사람들'로 치부된다.

분당의 집단 항의, 밀양에서도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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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765kV 송전탑 백지화 및 공사중단을 위한 경남공동대책위'는 10일 저녁 창원 정우상가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 윤성효


작년 초 송전탑 건설에 반대한 밀양의 70대 어르신이 분신으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술자리에서 서울 사는 친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송전탑을 세운다며 시골 인심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게 아니라, 차라리 서울에 발전소를 세우는 게 사회적 비용이 더 적게 들지 않을까?"

'알 만한' 친구의 답변은 이랬다.

"그걸 말이라고 하니? 서울 땅값이 얼마나 비싼데, 발전소를 지어? 인구가 적은 곳에 세우고 송전탑을 짓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고 경제적이라는 걸 몰라서 묻는 거니?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할아버지께는 송구하지만, 밀양 어르신들이 지역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정부에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거지."

그에게 서울에 발전소를 세울 수 없다는 건 '상수'였다. 이걸 건드리지 않는 전제에서 대안을 찾으려다 보니, 어르신들의 '지금 이대로만 농사짓고 살게 해 달라'는 요구조차 죄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부가 밀양에서는 지역이기주의의 문제가 정책 추진에 큰 장애가 된다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정작 분당에서는 꼬리를 내리고 스스로 정한 원칙을 내팽개쳐버렸다.

보호관찰소 이전 요구가 지역이기주의라는 지적에, 분당 주민들은 정부가 여론 수렴 등 최소한의 절차도 생략한 채 무리하게 추진한 행정의 잘못이라며 반박했다. 정부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지역이기주의라는 자극적인 용어를 퍼뜨리고 있다는 불만이다. 성남시장까지 나서서 지역이기주의로 몰아붙이는 걸 경계해야 한다며 정부에 화살을 돌렸다.

분당 주민들의 주장에 백 번 공감하고 동의한다. 다만 밤낮을 마다하고 수천 명이나 나선 그들의 일치단결된 모습을 부디 밀양과도 함께 나눠주시길 청한다. 송전탑 갈등 역시 정부가 절차적 정당성을 소홀히 한 채 마구잡이로 밀어붙이고 있는 행태로 비롯된 것이니, 분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밀양에서도 준엄하게 정부를 꾸짖고 함께 맞서 달라.
#수원보호관찰소 성남지소 #법무부 #지역이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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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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