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나는 추석

벌초 문화가 우리 집안 문화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등록 2013.09.16 11:39수정 2013.09.1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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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벌초 전 묘지. 잡초와 칡넝쿨이 무성하다.

벌초 전 묘지. 잡초와 칡넝쿨이 무성하다. ⓒ 이경모


나에게 추석 준비는 조상 묘를 찾아가 벌초를 하는 것부터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30여년 가까이 했으니 그럴 만도하다. 추석이 코앞인데 오늘 선산을 찾았다. 올해는 벌초가 좀 늦은 것이다. 선산(先山·조상의 무덤이 있는 산) 옆길에는 마치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처럼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세 곳 35기(基)를 벌초해야 하기 때문에 예초기 두 대와 인원이 필요하다. 오늘은 사정들이 있어 노모와 사촌 형, 당숙, 고숙, 사촌동생이 다였다. 낮에는 아직도 여름 더위 꼬리가 남아 있어선지 무척 더웠다. 봄에 큰집 형님이 제초제를 뿌렸는데도 미국자리공(외래종 식물)은 내 키만큼 커 작은 숲을 이루고 있고 칡넝쿨은 묘지를 꽁꽁 묶어 놨다. 그동안 조상님들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벌초하는 동안 내내 죄송했다. 21기를 한 곳에 모신 가족묘에 잡초가 더 많았다.
논두렁을 다섯 번은 베어야 가을이 온다고 했는데 올해 처음 풀을 베니 당연한 일이다. 서둘러 칡넝쿨을 걷어내고 부지런을 떨었지만 일의 진척이 더디기만 하다. 그런데 반가운 손님이 짱하고 나타났다. 매제와 동생이다. 그것도 예초기와 낫을 가지고 왔다. 덕분에 벌초는 빨리 끝났다. 간단히 준비해간 과일과 술을 따라 놓고 절을 했다. 추석 성묘를 제대로 한 것이다.

"어머니, 화장(火葬)하신다는 생각은 변함없으신가요?"
"암 그렇지. 당연하다."

매년 벌초 길에 감독(?)을 하시려고 함께 오신 74세 노모는 아들의 쌩뚱맞은 질문에 주저 없이 대답을 하신다. 막내며느리로 우리 집안에 시집오셨지만 지금은 혼자 남으신 어른이다. 마을에서 처음 합동제사로 제사를 모시고 가족묘지도 집안 자손들의 의견을 들어 조성을 하셔서 선산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시다. 어머니께 우문이었다. 매년 벌초를 한다는 것이 가끔은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산소를 깨끗이 정리하면 가슴 뿌듯한 게 있다.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어서다.

a  벌초가 끝난 묘지-깔끔해진 묘지들이 마치 추석 전에 이발을 한 것 같다.

벌초가 끝난 묘지-깔끔해진 묘지들이 마치 추석 전에 이발을 한 것 같다. ⓒ 이경모


"형님, 우리는 가묘(假墓-시신을 묻기 전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무덤)도 없는데 어떻게 하실 건가요?"
"우리는 화장해서 봉분(封墳-흙을 둥글게 쌓아올려서 무덤을 만듦) 없이 표지석만 세우고 평장 하세."
"저는 도기도 몇 년이 지나면 흙으로 되어버린 도기가 좋겠더라고요."

아직은 죽은 뒤를 논하기는 빠르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 그것이 진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고향 근처 식당에서 메기탕에 소주 한 잔을 하고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를 하곤 집에 왔다. 집에 막 도착하자 아들 녀석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 벌초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고모와 고숙이 와서 빨리 끝났다. 아들도 내년에는 시험에 합격해서 아빠랑 벌초하러 가자. 당숙 아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더라."
"네, 그럴게요. 낼 내려가서 봬요."


함께 벌초를 하겠다는 아들 녀석의 대답이 참 대견스럽기도 하고 뿌듯했다. 오늘 좀 힘들어서 그랬을까. 언제까지 우리 집안에 벌초 문화가 계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후손들이 집안 문화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조상을 숭배하는 것은 효의 기본이라고 생각해서다.

여름 내내 어디에 숨어 있다가 가을을 앞세우고 나타난 가을꽃도 보고 어릴 적에 추석을 손꼽아 기다렸던 고향마을을 둘러보며 올 추석은 시작됐다.
덧붙이는 글 월간잡지 첨단정보라인10월호에 싣습니다.
#이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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