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생략한 정부조달협정... 설명을 구걸해야 하나

[보좌관 일기] 국회 뒤통수 치는 대통령, 빠른 몰락이 우려됩니다

등록 2013.12.10 15:25수정 2013.12.1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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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방문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1월 4일 오전 프랑스기업연합회(MEDEF)에서 열린 한-프 경제인 간담회에 참석, 프랑스어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르몽드>에서 봤다고? 프랑스어를 해?"
"러시아어랑 비슷하거든요."
"러시아어도 할 수 있어?"
"제가 거기서 잠깐 살다왔잖아요."
"영어도 잘 하잖아. 그럼 도대체 몇 개 국어를 하는 거야!"

현재까지 파악한 바에 의하면 내 옆에 앉은 조 비서관은 4개 국어를 한다. 영어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프랑스어는 단어만 아는 수준이라고 손사래를 친다. 나도 르몽드를 읽을 정도의 단어만 알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사람 머릿속에 여러 언어가 동시에 떠오를 수 있는지 나로서는 상상 불가능한 영역이다.

조 비서관이 11월 4일 자 <르몽드>에 나왔다는 기사를 의원실 공유 메일에 올렸다. 유럽 순방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한-프랑스 경제인 간담회에서 '조달시장 개방'을 언급한 것에 대해 프랑스 기업인들이 환영했다는 내용이었다. 간담회 후 있었던 질의, 응답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 청와대 브리핑도 함께 올렸다. 프랑스 경제인들의 질의에 대한 대통령의 답변은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놀라운 박근혜 대통령의 답변

"도시철도 시장개방과 관련해서는 WTO의 정부조달협정의 국내 비준을 추진하고 있고 이 비준이 통과되면 연내 WTO에 비준 기탁서를 제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렇게 되면 도시철도 분야의 진입 장벽도 개선될 수 있다고 본다. EU 역시 정부조달협정에 대한 비준을 조속히 추진해 주길 바란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은 작년 국정감사에서 WTO 정부조달협정과 철도민영화의 연관성 의혹을 최초로 제기했다. 지난 1년 동안 국회에 보고된 것이 없는데 연내 비준을 추진한다니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상하게도 국내 언론엔 이 내용이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대문호 아나톨 프랑스의 말 "위대한 것을 성취하려면 행동뿐 아니라 꿈을 꿔야 하며 계획할 뿐 아니라 믿어야 한다"를 인용해 창조경제를 역설한 박 대통령의 '유창한' 프랑스어 연설 소식이 언론을 뒤덮었고, 기사 말미에는 프랑스 경제인들의 기립박수가 언급되었다. 외교 관행인 줄 알았던 기립박수가 달리 보였다. 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난, 11월 7일이다.


국제 협정은 용어도 어렵고, 내용도 상당히 복잡하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파악해 보자. 적어도 외국어는 아니다.

WTO 정부조달협정(GPA)은 1994년 WTO 설립 협정에 부속된 무역협정 중 하나로 1996년 발효되었다. 우리나라는 1997년부터 협정 적용 대상 국가가 되었다. 금액, 대상기관, 대상 서비스 등 일정 조건을 충족한 공공부문 조달에 외국 기업도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다는 거다. WTO 정부조달협정은 전문과 본문 및 부속서로 구성되는데 부속된 양허표를 통해 앞서 말한 일정 조건, 즉 개방 범위가 결정된다.

1997년 이후 개방 범위를 더 확대하자는 개정 협상이 진행되었고, 우리나라는 2006년 1월 1차 양허안, 2007년 4월 2차 양허안, 2010년 12월 3차 양허안을 제출하였다. 2011년 12월 개정 협상이 최종 타결되었고, 2012년 3월 WTO 정부조달위원회에서 채택되어 현재 각국에서 비준이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3차 양허안이다. 이때 애초에 없었던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전격적으로 추가되었는데 그 과정이 석연치 않았다. 양허안이 WTO에 제출되기 사흘 전, 대외경제장관회의가 열렸다. 국토해양부 장관이 이 희의에 한국철도시설공단을 개방 대상 공공기관 목록에 추가해 달라고 서면으로 수정 요청을 하였고, 그대로 의결되었다.

기존 조달협정의 개방 대상기관이었던 철도청은 2004년 '한국철도공사'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차 양허안에 바로 반영되었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은 철도청의 건설부문과 비양허기관이었던 (구)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을 통합하여 설립된 기관으로 철도건설과 시설관리를 주 업무로 한다. 철도공사와 같이 2004년 설립되었으나 1차, 2차 양허안에는 포함되지 않았다가 3차 양허안에 갑작스레 추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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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석 정의당 의원. (자료사진) ⓒ 유성호

이를 파악한 박원석 의원이 철도시설공단을 조달시장 개방 대상기관으로 추가한 것은 민영화의 수순으로 의심된다고 제기하였다. 작년 국정감사 때다.

11월 11일 오전, 박원석 의원이 첫 논평을 냈다. 박근혜 대통령이 프랑스 방문 기간 중 철도부문 조달시장 개방을 언급한 사실이 이때 처음 보도되었다.

다음날은 국무회의가 있는 화요일이다. 개정안이 안건으로 상정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국무회의 안건으로 상정된다는 것은 국회 비준을 받지 않겠다는 말이다.

긴급히 어떤 안건이 상정될 예정인지 알아봤다. 몇 시간 뒤 우리가 확인한 것은 11월 5일 국무회의에 이미 안건으로 상정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공식명칭은 '정부조달에 관한 협정 개정 의정서 수락안'이었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기자들에게  "WTO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에 대한 법제처 심사결과 국회 동의 불필요하므로 대통령 재가를 거쳐 비준하면 된다. 국무회의에 상정돼 있기 때문에 조만간 국무회의 심의 끝나면 대통령 재가 거쳐서 WTO 사무국에 제출할 것"이라고 하였다.

상정은 하였지만 의결은 하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일단 국무회의 의결을 막아야 했다.

11월 11일 오후, 박원석 의원은 두 번째 논평을 냈다. 국무회의 의결로 통상협정을 비준하는 것은 헌법과 통상절차법을 위반하는 것이니 반드시 국회 비준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국회 건너 뛴 대통령의 소통

11월 12일, 조 비서관에게 긴급 전달이 왔다. 상정만 했다던 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까지 끝냈다는 것이다. 급히 요청했던 자료에 버젓이 나와 있었다. 대통령의 프랑스 발언 직후 숨 돌릴 새도 없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국민을 속이고, 국회를 무시한 정부를 향해 국회에 비준안을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촉구했다. 세 번째 논평이었다.

이제 대통령이 서명만 하면 국내 비준 절차가 완료된다. 연내에 WTO 사무국에 비준 기탁서를 제출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이 성사된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기에 너무 엄청났다. 기민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13일 정의당 KTX민영화 저지 특별위원회 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했고, 11월 21일 긴급토론회를 개최했으며, 11월 24일 공공운수노조연맹, 전국철도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와 함께 공동기자회견을 했다. 일은 커져만 갔다.

우리는 국제 협정을 맺을 때 마다 엄청난 내홍을 겪어 왔다. WTO를 탄생시킨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을 둘러싼 갈등은 이십여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이었던 한-칠레FTA나 한미FTA는 말할 것도 없다.

통상 조약을 둘러싼 극심한 갈등을 줄이고자 국회는 2012년 '통상조약의 체결절차 및 이행에 관한 법률(아래 통상절차법)'을 제정하였다. 통상절차법이 정한 통상조약의 체결계획의 수립 및 보고(6조), 공청회 개최(7조), 국민의 의견제출(8조), 통상조약 체결의 경제적 타당성 검토(9조), 국회의 의견제시(10조), 영향의 평가(11조), 비준동의의 요청(13조) 등 어떤 것도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헌법도 위반하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은 조약 체결·비준에 관한 권한은 대통령에게 주면서 대통령의 독단적 결정을 견제하도록 입법부의 권한도 명시하고 있다. 헌법 60조 1항에 "(국회는) 중요한 국제조직에 관한 조약,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나와 있다. 헌법에 그 권한이 명시된 입법부가 국민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국제 협정에 대해 긴급 일변도로 대응해야 하는 상황은 희극적 비극이다.

완성된 그림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퍼즐 맞추기 하듯 정부 정책을 파악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여러 의혹에 대해 속 시원한 답변도, 공론화 과정도, 사회적 합의도 없이 국제 협정을 맺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번에 체결하고자 하는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이 향후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정부는 분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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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노조 총파업 전국철도노동조합이 수서발 KTX 운영회사 설립 이사회 개최 중단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한 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역 열차 승강장에서 무궁화호 한 대가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 유성호


정부의 견해는 다를 수도 있다. 차이나 이견은 언제든 존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함께 논의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통치자가 논의할 상대는 입법부다. 입법부를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 통치자는 필연적으로 전제적 권력을 형성하게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절대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달콤한 권력의 향기는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국회와 국민에 예의를 지켜달라

현명한 통치자라면 빠른 몰락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상대방을 존중할 것이다. 국민의 유일한 대의기관, 국회의 역할을 인정하고 국회와 협의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적어도 통상 협정의 진행상황을 외국 언론에서 접하도록 하는 것은, 국민과 국회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만약 조 비서관이 프랑스어를 읽을 줄 몰랐더라면, <르몽드>를 보지 않았더라면, 읽고도  무심히 넘겼더라면, 더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WTO 정부 조달협정 개정안이 비준되는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아찔하다.

몇 개 국어를 하는 대통령님의 나라에 걸 맞는 국민이 되려면, 대통령께서 순방하는 나라의 신문 정도는 원어로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건지, 단 하나의 외국어도 할 줄 모르는 나는 지금이라도 독학을 해야 하나 심히 고민된다. 남은 대통령 임기 동안, 외국어를 몰라 뒤통수 맞는 일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설명해 달라. 특히 통상 협정은 말이다.

11월 26일, 대통령이 WTO 정부조달 협정 개정 의정서 비준을 이미 재가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11월 15일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국회에서 여러 명의 국회의원들이 상임위 회의장에서 수차례 발언하고, 기자회견과 브리핑을 할 동안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였다.

설명은 과한 바람이었나? 제발 알려만 달라고 사정해야 하나? 침묵의 통치가 얼마나 갈지 두고 볼 일이다. 확인된 사실은, 박근혜 대통령은 현명한 통치자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WTO #조달협정 #박근혜 #박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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