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주
권우성
처음 몇 달은 이런 남편에게 투정도 부리고 잔소리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그러려니 하며 지내고 있다. 하지만 11월 말부터 이런저런 행사로 바쁘더니 12월이 되자 하반기에 진행한 여러 프로그램이 마무리 되면서 각종 송년회 일정이 잡히기 시작했다. 진행했던 프로그램마다 참여하는 지역사람들이 다르니 프로그램마다 마무리 겸 송년회를 하고, 지역의 여러 단체 송년회에도 가야 하는 듯했다.
"오늘도 늦냐"는 나의 볼멘소리엔 "어쩔 수가 없잖아, 일인데..."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 줄줄이 사탕처럼 잡힌 모든 송년회가 일과 관련된 모임이니 뭐라 할 말도 없긴 하다. 남편인들 제 아무리 좋아하는 술자리라 해도 거의 매일 늦은 시작까지 앉아있고 싶진 않을 것이다. "늦게 들어오고 싶어 늦게 들어오는 남편은 아무도 없다"는 남편의 속 보이는 변명을 아직은 믿어주는 척 하는 나이지만, 연말이면 각종 송년회 때문에 하숙생처럼 지내는 남편이, 남편을 그렇게 불러내는 사회가 야속하기만 하다.
연일 계속되는 송년회로 눈치가 보이는지 남편은 오늘도 늦는다는 전화의 말미에 재미없는 자리라며 밥만 먹고 오겠다는 빈말을 하고, 난 아닌 걸 알면서도 시계바늘이 되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되나, 더구나 송년회인데.
결국 난 또 해 떨어지면 더 보채는 돌도 안 된 10kg 넘는 막내를 업고 저녁을 짓고 혼자 세 아이 밥 먹이느라 내 밥은 코로 먹고(그나마 못 먹는 날도 많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세 아이에게 소리소리 질러가며 아이들을 씻기고 잠옷 입혀 겨우겨우 재운다. 남편과 둘이서도 바쁘고 정신없는 저녁 일과를 혼자 해내느라 혼이 쏙 빠질 지경인데 아이들은 불 꺼진 방에 누워서도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발산하며 하루 종일 기다린 아빠를 찾는다.
"엄마, 아빠 언제와? 아빠 보고퍼."특히 아빠를 따르는, 말문이 트인 지 얼마 안 된 둘째는 부정확한 발음으로 아빠가 출근하자마자 아빠 언제 오냐 묻고 보고싶다 찾아댄다. 날씨가 추워져 놀이터 나들이도 거의 못하는 통에 아이들은 넘치는 기운을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데 쓰고, 종일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엄마에 비해 잔소리도 덜 하고 잘 놀아주는 아빠를 찾아 댄다.
언제 집에 오냐는 나와 아이들의 물음이 남편에게 스트레스가 된다는 걸 알지만 나도 아이들도 스트레스를 받긴 매 한가지다. 만 5년째 만성수면부족에 하루 종일 세 아이를 집에서 혼자 돌봐야 하는 나와 재미난 건 다 아빠 오면 하자며 뒤로 미루기만 하는 피곤한 엄마와 종일 집에 있어야 하는 아이들에게 남편의 잦은 송년회는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폭탄주와 탬버린, 이런 송년회 꼭 해야할까?일요일에도 1박2일로 송년 워크샵을 가는 지경에까지 이르니 송년회를 꼭 해야 하나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나도 결혼 전엔 이런저런 송년회로 연말이면 참 바빴는데, 송년회 핑계로 오래 못 본 얼굴들도 보며 즐거웠는데 결혼 후 5년 동안 출산 육아만 반복하고 지내다보니 거의 송년회는 참석하지 못하고 지내고 있어 송년회가 뭐였는지 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송년회는 누구에게나, 어떤 조직에게나 필요한 자리이다. 한해를 마무리 하고 새로 맞을 한해를 준비하는 '송구영신' 뜻 그대로인 송년회는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과연 밤늦게 2차 3차까지 이어지는 송년회에서 송년회 본연의 뜻한 바는 취하지 않고 얼마나 깨어있을까?
송년회에서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다하지 못한 숙제들, 털고 가야할 과오들, 새롭게 품는 희망들을 정리하다보면 분위기에 취해 주객이 전도 되어 술을 위한 자리로 마무리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남편은 이직한 직장에선 덜하지만 각종 이해관계와 갑을관계로 엮인 예전 영리기업의 송년회 자리는 거의 술을 위한 자리가 되어 심신이 스트레스로 가득 찬 12월을 보내야만 했다.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남편의 표현을 빌리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남자들의 세계는 어쩔 수 없다"며 요즘도 술로 시작해 술로 마무리 되는 피곤한 송년회 릴레이 중이다. 그래도 본인도 눈치가 보이는지 피곤한 걸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11월 중순부터 달아 달라 부탁한 커텐 봉이 송년회에 밀려 며칠 전에야 겨우 달렸으니 말 다 했다.
분명 송년회는 술 마시자고 모인 자리는 아닐 텐데, 어쩌다 우리문화의 송년회는 술이 되어버렸을까. 요즘은 단체 영화나 공연관람 혹은 자원봉사로 송년회를 대신하는 곳도 많이 늘고 있다 하던데 남편은 어제도 폭탄주를 세 사발이나 마셨다며 아이들이 잠들기도 전에 잠이 들어버렸다.
촛불을 켜고 우리들만의 송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