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여인 치마폭에 숨은 관조운... 은혜 입었다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 21] 은혜(2)

등록 2014.02.24 17:50수정 2014.02.2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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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은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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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여인은 나이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를 올린 것으로 보아 지아비가 있는 것 같았다. 화려한 천을 이어붙인 수전의(水田依 : 명대에 유행한 여성복으로, 천 조각을 붙여놓은 모양이 밭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를 입고 맞깃 아래 정교한 옥패를 달아 어느 세도가의 마나님 같은 차림이다.


갸름하고 흰 얼굴에서 부귀가 타고난 것 같았다. 여인의 눈은 우물처럼 깊었다. 그 눈은 세상살이를 다 경험해 본 사람처럼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세상사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무심한 것 같기도 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 여인은 과연 나를 도와줄 것인가. 관조운은 애가 탔다. 지금쯤 금의위 무사가 마차 근처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밖으로 내쫓긴다면 바로 금의위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될 것이다.

"부인, 부탁드리오!"

가타부타 말이 없는 부인을 향해 관조운이 다시 한 번 애타게 쳐다보았다.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희미하게 끄덕였다.

"성문을 통과하게 해주시오, 부인."

관조운이 다시 한 번 다짐하듯 말했다. 여인은 이번에도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님, 맡겨놓은 비파를 도기전에서 찾아왔습니다. 안에 들입갑쇼?"

마차 밖에서 마부가 소리쳤다.


"아닐세, 짐칸에 넣어주게."

여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차 뒤편의 짐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출발할 갑쇼?"
"서둘러 주게. 오시까지 파양진에 닿으려면 서둘러야 할 것이네."
"네, 그렇습죠. 그런데 지금 성문에서 검문을 하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누군지 수문장에게 이르면 될 것이네. 막중한 국사(國事)에 임한 임 도독의 부름을 받고 가는 것이라고 하면 될 것이네."
"네, 그렇습죠. 수문장 따위가 어찌 감히……."

마부의 목소리가 작아지며 어자석에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은 손에 있던 비단을 넓게 펼쳤다. 비단은 옷 한 벌은 충분히 나올 정도로 넓었다. 그녀는 관조운에게 손짓으로 의자 밑 발을 놓는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관조운은 무얼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여인의 발이 놓이는 움푹 패인 곳에 엎드렸다. 몸을 최대한 작게 웅크린 채. 여인은 가지고 있는 비단으로 관조운을 덮었다. 그리고는 다른 비단을 그 위에 또 덮으며 그 비단을 수를 매만졌다. 마치 마차 안에서 할 일이 없어 비단을 펼쳐놓고는 수(繡)를 감상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도독 어르신 댁 안채에 계신 분이라도..."

마차는 길게 늘어선 줄에 대지 않고 성문으로 직접 가는 것 같았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고는 밖에서 대거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마부가 내려서는 모양인지 마차가 출렁했다. 잠시 후 마차 밖에서 칼칼하면서도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마님, 아무리 도독 어르신 댁 안채에 계신 분이라도 지엄한 국법이 따로 있는지라 저 같은 수문장은 파리 목숨입니다. 그러니 절차에 따라주시면 은혜로 알겠습니다."
"수돌 아범, 문을 열어드리게나."

여인이 다소 위엄을 갖춰 말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수염이 사방으로 뻗친 사내가 마차 안을 훑었다.  

"국법이 지엄한데 일개 아녀자가 어찌 고집을 피우겠소. 다만 저잣거리의 중인(衆人)들한테 우리 대감의 밀지가 알려지는 게 두려워 편법을 부탁했을 뿐이오."

여인이 부드럽게 수문장을 향해 말하자.

"아니올시다, 마님. 저희들끼리만 있다면야 도독 어르신 댁 마님을 어찌 감히 세우겠습니까. 다만 지금은 황궁 금의위에서 나온 사람들이 같이 있는 고로 저희가 기찰하는 행색이라도 내야 했습죠. 헤헤."

수문장은 마차 안을 휘돌아 보았다. 그러더니 여인의 발치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대감께 지어 올릴 옷감을 준비해 가는 것이네. 무료해서 마차 안에서 살펴보고 있다네. 이것들을 치워야 하겠는가?"

여인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반문하자 수문장이 오히려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마님, 됐습죠. 마차 안을 살피게 해주신 것만 해도 저한테는 황송한 일입니다. 하찮은 수문장 단고(段高)가 마님 행차하시는데 수고를 좀 덜어드렸다고 대감님께 한 말씀만 해주시면 저로서는 더 없는 은혜 입죠. 헤헤."

마차 안에 이상이 없다고 확신했는지, 태도를 더욱 굽실거렸다.

"알겠네, 성문을 지키느라 주야로 수고하는 것만도 찬(讚) 할 일인데, 이렇게 편리까지 봐주니 내 어찌 모른척하겠소."

여인이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이어 문이 닫히고 마부가 어자석에 올랐다.

"마니임, 출발합니다. 이랴!"

마부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성문에 울려퍼졌다.

"관 공자님, 불편하시죠. 이제 그만 일어나 앉으세요."

쪼그린 채 엎드려 있는 관조운의 등 뒤에서 여인의 말이 들렸다. 관조운은 놀랐다. 이 여인이 어찌 나의 성씨를 안단 말인가. 관조운 굳은 몸을 펴고 허리를 세웠다. 키가 큰 관조운이 좌석 밑에 쪼그려 오 각(刻)을 있었으니 온 몸에 쥐가 날 지경이다. 그나저나 이 여인은 나를 안단 말인가?

관조운이 반은 의문에 찬 눈길로, 반은 혹시 내가 아는 여인인가 하는 탐색의 눈길로 쳐다보았다. 마차가 들판을 달리는지 우르르 소리가 실내에 울려퍼졌다. 일부러 큰소리를 내지 않는 한 대화 정도는 마부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부인께서 혹시 저를 아시는지요?"

관조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여인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소녀, 진기련입니다. 기억 나시는지요?"
"진, 기, 련?"

관조운은 여인의 이름을 되뇌었으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여인이 쪽진 머리를 풀었다. 삼단 같은 머리가 좌르르 흘러내렸다. 그래도 관조운은 여인이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육 년 전, 선유각(仙遊閣)이라면 기억하시겠는지요?"

여인이 기억을 일깨우듯 관조운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관조운은 오른 손으로 왼쪽 어깨를 두드리면서 생각에 잠기다가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여인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가녀린 그녀가 이렇게 농염한 여인으로 변해 버릴 줄이야. 육 년이라면 소녀가 성숙한 여인으로 변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덧붙이는 글 월,수,금, 주3회 연재합니다
#무위도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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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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