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회] 아리따운 낭자의 무예에 넋을 잃다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 23] 혁련지(1)

등록 2014.02.28 09:32수정 2014.02.2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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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혁련지

a 무위도 無爲刀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필진진은 이 넓은 장원을 청상인 자기가 언제까지고 관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시동생 관조운이 어서 빨리 가문의 적통을 잇고, 자신은 그저 한 발 물러나 아들 섭월의 뒷바라지만 하고 싶었다. 섭월이 아버지의 재주를 십분은 둘째 치고 칠팔 분, 아니 오륙 분만 물려받아도 향시(鄕試) 정도는 무난히 합격해 거인(擧人)의 지위를 획득할 것이고, 차후 예부에서 시행하는 경시도 통과해 진사(進士)까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황궁에서 시행하는 전시(殿試)까지 생각하진 않더라도, 저의 아비처럼 진사의 신분이라도 득하면 이곳 향리에선 아무도 무시하지 못할 가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섭월이 학문에는 그다지 뜻이 없고 하인들의 자식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다. 오지랖도 넓어 나다니기를 좋아하고, 이리저리 잡기(雜技)에도 관심이 많았다. 제 아비를 닮지 않고 제 숙부를 닮았다. 자신의 첫 연정이 아이의 숙부였기 때문인가, 라고 생각하다 진진은 스스로 흠칫 놀랐다. 이내 그런 생각이 스며든 자신을 나무랐다. 별 생각도 다하누.

오늘도 섭월은 오전 경서 읽기가 끝나자마자 바깥채를 향해 뛰쳐나갔다. 내당에 들어선 진진은 장원의 살림살이를 살펴보고 장부를 검토해 하인들의 일상을 지시해야 한다. 관가장은 장원에 딸린 식솔들만 오십명이 넘고, 그밖에 소작을 준 전답까지 합하면 이백여 명이 넘는다. 이들의 금전출납과 길흉대사를 일일이 챙기려면, 비록 집사가 있더라도 그녀 자신도 한시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진진이 내당 현관의 문을 여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웬 낯선 사내 둘이 떡 하니 서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들은 무복차림에 어깨에 칼을 멘 무사들이다. 붉은 무늬가 어린 비단 배자를 걸치고 가슴엔 노란색으로 '金'가 새겨져 있다.

진진이 놀란 표정으로 서 있자 그 중 한 사내가 포권을 하며 말했다.

"부인, 실례하오. 놀라셨다면 용서 바라오, 막중한 국사를 치르다보니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태도는 그다지 미안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키가 크고 기골이 단단했다. 눈매가 매섭고 입술이 선명해 고집스럽고 옴팡진 인상이다. 전체적으로 힘을 쓰는 자의 강인함과 오만함이 배어 있다. 그 곁에 있는 사내는 수하 같았다. 일단 옷부터가 비단이 아니고 '金'자도 노란색이 아닌 검은색이다.

"누구시길래, 남의 집 안채까지 허락 없이 출입하시는지요."


진진이 흔들림 없이 말했다.

"저희는 금의위에서 나왔고, 저는 영반(領斑) 조복(曺馥)이라고 합니다. 이 댁의 관조운이란 자가 국사를 범한 행위가 있어 저희가 추찰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 분은 저의 시숙(媤叔)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국사에 반했다는 것이온지."
"자세한 내용은 기밀에 속합니다. 이 자가 어디에 있는지 부인께서 알려주시면 저희가 국사를 수행하는데 한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도련님은 이곳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예전부터 분가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아는 바가 없습니다. 엊그제 단오절을 맞아 제 자식을 데리고 저자에 구경을 갖다 온 후 저도 뵙지를 못했습니다. 더 이상은 저도 할 말이 없으니, 이제 남녀가 유별한 안채에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진진의 말투가 싸늘하게 변했다. 제 아무리 금의위의 위세가 높다지만 그건 지방 행정 관아에서나 통할 일이다. 통고도 없이 가타부타 안채에 불쑥 들어서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갑자기 이 자들이 밤새도록 관가장을 지켜본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시동생이 나타나지 않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며 정식으로 추궁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사범을 감시 체포하는 건 저희 임무입니다."

조복도 딱딱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남의 집 안채를 허락없이 드나들고 무시로 감시하는 것쯤은 아랑곳 않는다는 태도였다.

이때 섭월이 안채로 뛰어들어 왔다.

"어머니, 어머니, 지금 관병과 포두장이 대문 앞에 와 있습니다!"

아이는 걱정이라기보다는 호기심이 앞선 말투로 소리를 지르며 현관으로 뛰어들었다가 낯선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라 멈췄다. 그러다 맞은편에 어머니가 보이자 이내 그 뒤로 숨었다.

조복은 입가에 보일락 말락 하는 미소를 지으며 옆의 사내에게 명령했다.

"포두장에게 연락해 관가 놈의 형수와 아이를 데려가라고 해."

수하가 예, 하고 물러났다.

진진은 어이가 없었다. 이 자들이 왜 우리 모자를 연행해 간단 말인가.

"조영반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 모자를 데려가는 겁니까. 아무리 국법이라도 절차와 근거가 있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진진의 눈에서 광채가 났다.

"이 모든 것이 부인과 자제분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더 무서운 곳에서 손길이 뻗치기 전에 저희가 모시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조복이 이번에는 드러나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관조운은 연 장문인이 갈 곳이 있는지 물었을 때 왜 갑자기 혁련지가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충동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아직도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삐져나온 것일까. 혹은 자신이 처해진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선 그녀의 총명이 필요했기 때문일까. 아마 이 모든 것이 한데 엉킨 미묘한 감정 때문일 것이다.

관조운이 관외제자로 지내면서 모충연에게 유학(儒學)을 전할 때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제 사제의 관계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무예로 따지면 관조운은 모충연의 제자지만, 유학이라는 학문의 세계에서는 이제 관조운이 스승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서 맺은 인연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이로 따져도 부모벌이니 관조운은 계속 스승의 예로 대했다. 모충연 역시 배움의 관계에서는 역전되었지만 단지 학문의 배움이 아닌 인생의 가르침에선 무림에서 겪은 환난신고가 훨씬 깊으니, 굳이 예전의 관계를 엎어가며 격식을 번거롭게 하고 싶진 않았다. 이들 사제지간은 무엇이 오가고 어떤 식으로 흐르던 배움의 통로가 중요했지 관계의 형식이 중요하진 않았던 것이다.

그 해는 스승님이 장기 출타를 했었다. 관조운은 여름 한 계절을 건너뛰고는 가을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스승의 저택을 찾아 갔다. 단오 경 출발하시며 늦어도 처서를 넘기지 않겠다던 스승님이 추분이 다 되도록 도착 기별이 없었다. 그는 비영문에 사정을 알아보고자 나섰다가 혹시나 싶어 먼저 스승님의 모옥을 찾아갔다. 

모옥은 말이 모옥이지, 마당이 너르고 배흘림기둥에 기와지붕을 인 튼실하고 야무진 저택이다. 한때 강호를 풍미했던 일운상인 모충연이 생의 말년을 보내기 위해 제법 공을 들인 저택인 만큼 규모는 크지 않더라도 별채와 중정까지 갖추었다.

대문이 열려 있어 굳이 소리 낼 것까진 없이 조용히 들어서니, 마당에 웬 낭자가 장검을 손에 쥐고 수련에 몰두해 있다. 여자치고 키가 큰 편이라 그런지 동작 하나가 크고 시원했다. 초식을 전개하는 것이 무희가 춤을 추는 것처럼 섬세하면서도 유려했다. 그녀가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검날이 가을 햇살에 반짝여 보석을 허공에 뿌려놓는 것 같았다. 마치 옛 이야기에 나오는 선녀들의 하강무(下降舞)처럼 눈부셨다. 관조운은 자기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뭘 그리 보는 거예요? 예의 없이!"

갑자기 공기를 가르는 고성이 가을 햇살을 갈라놓았다.  

관조운이 정신을 차리니 낭자가 칼끝을 관조운을 향하고는 학처럼 한발을 든 채 멈춤 동작으로 서 있다. 콧날이 가지런하고 반달눈에 박혀 있는 동자가 흑요석처럼 새까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총기를 느끼게 하였다. 긴 머리를 동여맨 비단끈이 바람에 나부끼지 않았더라면, 관조운은 마치 석굴에 부조된 비천녀 조각상을 보는 것처럼 현실감을 잃었을 것이다.

관조운은 깜짝 놀라 포권을 하며 말했다.

"소저, 방해를 했다면 미안하오, 소저의 춤 솜씨가 너무 아름다워 그만……."
"이건 춤이 아니라 무예예요. 검으로 동작의 형식을 정해놓은 초식이란 거죠."

유건을 쓴 서생차림의 관조운을 보자 그녀가 설명조로 덧붙였다.

"아무튼 내게는 아름다운 춤으로 보였소이다."
"그래요? 과히 듣기 싫은 말은 아니군요."

자신의 초식을 춤에 비유하며 칭찬하자 낭자는 으쓱한 기분이 든 모양이었다. 

"방금 전에 시전했던 초식이 혹시 비영문의 절학인 청학십삼식(靑鶴十三式)이 아니오?"
"어? 무공을 아시는 모양이네요? 그럼 그중 몇 번째 초식인지는 알고 계시나요?"

낭자는 관조운이 청학검법을 알아맞히자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더욱 자세한 것을 물어보았다. 관조운의 식견을 가늠함으로써 그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인 것 같았다.

"아니 제 몇 식인 것까지는 소생의 견식으론 모르겠소. 알려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청학십삼식 중 제 삼 식 청운관형(靑雲毌形)이에요."

낭자는 처음 마주쳤을 때의 날카로움을 거두고는, 자신의 검식을 칭찬하는 사람 앞에서 여유를 가지려는지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관조운은 비영문에서 청학검법을 전수받지 못했다. 청학검법은 비영문의 공식 검법이 아니고 일운상인이 은퇴한 뒤 새로 만든 검식이었다. 이 검법은 실전용이나 강호에 위용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닌 검(劍)과 신(身)과 혼(魂)의 조화를 목표로 하는 수양의 성격이 강했다. 관조운이 모옥을 방문할 때 가끔씩 마당에서 시전을 하는 스승을 보고, 그것이 스승님이 말년에 새롭게 창안한 검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관조운은 길을 달리한 입장에서 굳이 전수해달라고 조르진 않았다. 그 검법을 익히기에는 자신의 무공이 궤도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 또한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생면부지의 낭자가 일운상인의 마지막 작품인 청학검법을 수련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아주 숙달된 경지로.
덧붙이는 글 월, 수, 금 주3회 연재합니다
#무위도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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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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