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잔혹동시'가 문제라는 잔혹한 세상

등록 2015.05.10 17:11수정 2015.05.10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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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요즘 '핫'한 '잔혹동시'에 관해 말하려 한다. 필자는 현재 문예창작학과에서 시와 소설을 전공하고 졸업을 앞둔 4학년 재학생이다.
 
4년간, 시와 여러 글들을 배우고, 읽고 또 써왔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글을 쓰는 것에 연령의 제한이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듣지도 못했다. 물론, 글을 쓰는 것에 있어서 경험은 좋은 양분이란 것에 과하게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작자 개인의 역량이지, 독자가 '아직은 이르다' 혹은 '아니다'로 판단할 거리는 되지 못한다. 독자의 역할과 권한은 작품에 한한 것이고, 절대로 작자에게 침범하지 못 한다. 그것은 또 다른 월권(越權)이라 생각된다.
 
잔혹동시의 작가는 아직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초등학생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열 살이란 것은 오로지 육체에 국한된 신체 나이이고, 아이가 어떤 생각과 사상을 갖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재 대중의 시선은 아이의 신체 나이에 머물러 있다. 글이란 본래, 생각만 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쓸 수 있는 것이다. 손이 없어도, 눈이 보이지 않아도 쓸 수 있는 문학 앞에서 신체 나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시'는 문학 중에서도 '천재'의 영역을 가장 과감히 인정하는 장르이다. 프랑스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아르튀르 랭보(1854~1891)는 데뷔 당시 16세였다. 박범신 작가의 <은교>를 보면, 주인공 이적요가 은교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이적요는 육십이 넘는 노인이다. 우리는 '노인도 성욕을 느낄 수 있고, 아이도 잔인함을 가질 수 있는' 문학판에서, 더는 잔혹한 시를 쓰는 아이가 이상하다고 느껴선 안 된다. 그것은 '노인은 오로지 무기력하고, 아이는 오로지 순진하다'는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된 편협한 시선이다.
 
그렇다고 지금 잔혹동시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동시(童詩)'라는 데에 있다. 시에 나오는 "이빨을 다 뽑아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라는 구절은, 그 대상이 엄마를 향한다는 것을 배제하더라도 분명, 전체연령이 읽을 수 있는 동시의 성격을 벗어났다. 작자인 아이가 저러한 구절을 머리에서 떠올린 것이 문제가 아니다. 저러한 구절들이 무분별하게, 무방비한 아이들에게도 읽힐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원래, 이러한 문제들은 출판사 측에서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리고 해당 출판사는 동시집을 전량 회수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번 사건이 논란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작자인 아이와 시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문학을 바라보는 대다수의 시선이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보여줬다.
 
위에 인용한 구절을 포함한 동시의 제목은 "학원 가기 싫은 날"이었다. 잔인한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세상이다. 어른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순진하기만을 강요하는 것인가.
#잔혹동시 #동시 #학원가기 싫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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