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노인이 기록한 전쟁... 담담해서 더 무섭다

[서평] 백대현의 <녹슨 파편의 사연들>

등록 2015.05.30 16:06수정 2015.05.30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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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대현의 <녹슨 파편의 사연들> ⓒ 이야기너머

스물을 갓 넘긴 청년 백대현씨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시행된 병역법에 따라 징집되었다. 1950년 2월 9일이었다. 수도경비사령부 보병 제2연대에 입대한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다.

청년은 아무런 준비 없이 전쟁과 마주쳤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로 접하는 전쟁은 현실이 아니지만, 청년이 마주친 전쟁은 현실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이틀 전, 38선 부근의 최전방으로 배치되었고 그곳에서 참혹하면서 끔찍한 전쟁의 맨얼굴을 만났다.


처음에는 적이라는 인식이 없었던 인민군을 향해 살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연달아 총을 쏴야 했고, 쏟아지는 총탄 속을 미친 듯이 달려야 했다. 그가 전쟁터에서 본 주검들은 '사람의 시체라기보다는 시커멓게 타버린 고깃덩어리'였다. 무수히 흩어진 주검을 보면서 청년은 자신도 그런 주검이 될 수 있다는 엄연한 현실에 진저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싸워야 했고, 극심한 추위에 시달리면서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함께 싸웠던 전우를 잃기도 했다. 청년은 이런 전쟁터에서 2년2개월을 보냈고, 후방으로 전출됐다. 그리고 전쟁은 끝났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죽었지만 그는 살아남았고, 가족을 이루고 삶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가 본 전쟁의 참상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그의 기억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참혹한 죽음의 현장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80대 노인이 된 청년, 전쟁의 기억을 기록하다

세월이 흘러 80대 노인이 된 청년은 전쟁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펜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바로 백대현씨의 나의 6.25 이야기 <녹슨 파편의 사연들>이다.


대부분의 회고록이 자신의 지난 과거를 과도하게 미화하고 부풀리면서 무용담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지만 백대현씨의 <녹슨 파편의 사연들>은 피가 튀고 살이 타는 전쟁의 참상을 담담하면서도 절제된 표현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묘사된 전쟁은 더 무섭게 현실로 다가온다.

생사람을 겨누고 쏜다는 죄의식보다도 내가 쏘지 않으면 내가 적탄에 맞아 죽게 된다는 강박감에 검지손가락이 기계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아무런 증오심이나 죄책감 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이 순간은 한 핏줄이라는 동족의식 속에 애매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인민군'이 이제부터는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또 그것은 지금까지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이 시대의 방관자에서 참여자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했다. - 본문 27쪽

이보다 더 생생한 증언이 또 있을까?

직격탄을 맞고 파괴된 탱크 안에는 허리가 잘려 두 동강 난 시체가 검게 타버린 채 뒹굴고 있었다. 잘려나간 상체 허리 부분의 살은 타서 오그라들었다. 그것은 사람의 시체라기보다는 시커멓게 타버린 고깃덩어리였다. - 본문 33쪽

그런 전쟁터에는 백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수많은 전우들이 있었다. 백씨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놀라운 기억력이 아닐 수 없다. 하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함께 수없이 넘나들었던 이들인데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백대현씨는 이 책을 쓰면서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둘씩 부르며 그들의 존재를 일깨운다. 그들이 없었다면 그 끔직한 현장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참혹한 전쟁터에서도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 또한 사람이 삶을 이어나가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평양에서 냉면을 먹고 싶어서 찾아다니던 일, 전우가 내민 머리빗으로 오랜만에 머리를 빗었더니 머리에서 이가 우수수 쏟아지던 일, 오랜만에 김장김치를 먹으면서 행복해 하던 일 등이다. 그는 그런 이야기조차 감정을 배제한 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런 대목을 읽노라면 감정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핑 돈다. 그건 스물을 갓 넘긴 청년들의 모습에 20대인 아들의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만일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내 아들이,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이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그런 의미에서 볼 때 20대 평범한 청년이 온몸으로 부대끼면서 겪어낸 참혹한 전쟁 이야기는 그 어떤 주장보다 깊은 설득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우리가 6월, 호국의 달을 맞아 <녹슨 파편의 기억들>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 역시 같은 심정이라는 것을 그가 쓴 서문에서 알 수 있다.

가슴 아팠던 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오늘도 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40여 년 전이 과거를 되돌아보는 이 글이 오늘과 내일의 남북관계를 올바르게 보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저자 프롤로그에서
#백대현 #한국전쟁 #전쟁 #녹슨 파편의 기억들 #이야기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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