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이 날개 자르는 부모? 기가 막혔다

[지원이의 선택 ③] 17살, 엄마와 딸의 바람이 부딪힐 때

등록 2015.09.12 19:43수정 2015.09.1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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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포를 넘어선 n포의 시대. 여기 포기 대신 선택을 하는 아이, 열아홉살 지원이가 있습니다. 수능대신 취업을 선택한, 제 딸 지원이의 다이내믹한 성장과 독특한 선택의 과정을 한해한해 시간의 역순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선생님은 작심한 듯 지원이를 감싼다.

- 선생님, 지원이가 고등학생이 되더니 화장을 너무 진하게 해요.
"어머님, 오시는 길에 3학년들 혹시 보셨어요? 그 정도에 비하면 1학년 아이들은 학교에서 용인할 수 있는 정도예요. 지원이가 특별히 진하게 하는 것도 아니에요."

- 선생님, 지원이가 학교는 늦지 않게 잘 오나요? 가끔 늦잠을 자요.
"어머님, 지원이가 집이 먼데도 아침에 제 시간에 딱딱 와서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요. 집 가까운 아이들이 더 지각해요."

- 선생님, 지원이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던데, 혹시 아세요?
"네, 안 그래도 아이들이 말하더라고요. 그 남학생 옆 반 아이라 저도 그쪽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착한 아이라고 해요. 공부도 잘하고."

- 선생님, 지원이가 지난 시험에 꼴찌를 했어요.
"네, 꼴찌 맞아요. 안 그래도 지원이랑 얘기를 해봤어요. 수업 태도도 좋고 발표도 잘해서 저는 지원이가 성적을 잘 받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성적이 너무 안 나와서 저도 놀랐어요. 사실 성적이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만, 중간 정도는 나와 줘야 취업에 유리해요. 성적관리 중요하다고 말했으니 알아들었을 거예요."

"그래도…."

마침내 난 할 말을 잃는다.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말한다.

"어머님, 지원이 여러 가지로 힘들 텐데 학교생활 꿋꿋하게 잘하고 있어요.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고 예절도 바르고 참 사랑스러운 아이예요. 집에서도 지원이 많이 사랑해주세요."


무엇인가 뒤바뀐 것 같은 고1 지원이의 담임 선생님과 나와의 대화다.

그토록 원하던 특성화고 산업디자인과 1학년, 지원이는 학교의 매력에 푹 빠진다. 학교가 자신에게 딱 맞는다며 휴일에도 등교하고 싶어 할 정도로 학교에 대한 애착이 크다. 자신이 디자인한 과제가 칭찬받아 복도에 걸리고, 동아리의 선배들로부터 귀염을 받는 경험들이 모두 즐겁다. 그러나 지원이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17살, 여러 가지 문제가 터져 나온다. 그중 하나가 바로 기능영재반을 둘러싼 나와 지원이의 갈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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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화고에 입학한 지원이 ⓒ 최경숙


기능영재반. 참 멋있는 이름이다. 지원이가 입학한 특성화 고등학교에서는 기능영재반을 운영하고 있었다. 디자인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3,4명 선발하여 주중, 휴일 할 것 없이 전담 선생님이 따로 지도한다. 학교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영재반 아이들은 각종 기능대회에 참가하여 학교의 위상을 드높였다. 재능 있는 딸아이가 특성화고에 입학했으니 기능영재반에 들어가서 학교와 선생님의 지도로 기능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땄으면 하는 것이 엄마의 소망이었다.

기능영재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지원이는 애초에 그 동아리에 별 관심이 없다. 엄마가 전에 없이 노골적으로 시험을 보면 좋겠다고 해서 응시를 했을 뿐이다. 테스트 과제는 '월드컵 포스터 그리기'라는 주제다. 그 아래로 월드컵 캐릭터 2명을 넣고 지정된 문자를 타이포그래피화 시켜 표현하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지원이는 단번에 아이디어나 스케치 구상을 하는 유형이다. 이날도 도화지 위에서 소용돌이치는 아이디어들을 행여 하나라도 놓칠세라 쉬지 않고 손을 움직여 레이아웃과 가이드선을 그려놓는다. 그리고는 주어진 시간을 반도 채우지 않고 과제물을 완성한다. 선생님은 놀란 눈치다.

"어떻게 구도를 이렇게 빨리 잡았죠? 포스터는 배열과 비율이 중요하니 필요하면 자를 사용하라고 했을 터인데. 물론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굉장히 비율 설정을 잘했네요."

선생님의 불길한 칭찬은 곧 기능영재반에 들어와 아이들과 함께 대회를 준비해보겠느냐는 제안으로 귀결된다. 차라리 떨어졌다면 좋았을 텐데, 지원이가 원치 않았던 합격이란 결과를 두고 엄마와 딸은 싸워야 했다.

난 이 좋은 기회를 내팽개치는 지원이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고 지원이는 갑자기 철학과 세계관이 변한 엄마가 낯설다고 했다. 지원이의 당시 카톡 프로필 사진은 아이의 날개를 자르는 부모의 이미지였다. 기가 막혔다. 내가 공부를 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학원에 다니라고 한 것도 아니고 특성화고의 꽃인 기능영재반에 들어가서 열심히 해보라 한 것뿐인데.

결국, 지원이는 기능영재반 전담 선생님께 자신은 여기에 맞지 않는다는 표현을 해서 합격을 취소 받았다. 여파는 오래갔다. 나는 딸아이의 모든 행동이 못마땅했고 지원이는 그런 엄마를 못 견뎌 했다. 여름방학 동안 지원이는 집에 있기 싫다며 종일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여 더욱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엄마와 딸이 최초로 서로에 대해 실망한 때였다.

그 상황을 극복한 것은 담임 선생님의 도움이 컸다. 천만다행으로 17살 지원이에게는 자신을 믿고 사랑해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어떤 경우에도 지원이의 편이 되어주었다. 심지어 엄마인 내가 딸아이의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늘어놓을 때조차 역시 조목조목 그게 아니라고, 지원이 잘하고 있다며 사랑해달라고 한 것도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런 선생님을 보며 나 자신을 반성했다.

지금 생각하면 결국 지원이가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롭게 상상하기 좋아하는 지원이가 매일 밤 9시까지, 휴일이고 방학이고 없이 매일 영재반에서 기능을 익혔을 때 과연 그 결과가 긍정적이었을지 확신이 없다. 지원이에게 기능영재반은 또 다른 수학학원에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을 지금에야 깨닫는다. 결국, 엄마와 딸의 바람이 부딪힐 때 엄마는 딸의 선택을 믿어주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17살 지원이의 담임 선생님이 지원이에게 그러했듯이 말이다.
#자녀와 갈등 #기능영재반 #특성화고 #선택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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