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명북고등학교 김영호(가명) 학생이 19일 오후 경기도 광명 하안사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 철회를 촉구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있다.
유성호
뉴발란스 책가방을 멘 남학생 한 명이 버스 정류장 한 편에 서서 검지 한 마디만큼의 크기로 스카치 테이프 4개를 뜯었다. 이윽고 정류장 벤치 중앙 벽에 준비한 대자보를 꺼내 조심 조심 모서리마다 테이프를 붙이고 돌아섰다.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무엇을 붙이나 흘깃 쳐다봤다.
"나는 역사학도를 지망하는 예비 사학도의 사명감과 교육의 주체인 학생의 양심에 발로(發露)하여 (중략)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 철회를 엄중히 요구하는 바이다."19일 오후 4시, 자신이 살고 있는 경기도 광명에서 대자보 행동에 나선 김영호(가명, 광명북고등학교 3학년)군을 현장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 봤다. 그가 준비한 대자보는 총 5장. 4.19 혁명 선언문을 참고해 썼다고 했다. 지난주 금요일(16일)부터 통학 버스가 자주 다니는 곳 등 또래의 눈에 잘 띌 법한 곳을 찾아 붙여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처음에 두 장 정도만 할까 했다가 한 장 붙이고 나니까 할 만하더라고요. 촛불 집회도 참여하고 싶은데 학교 수업에 매여 있어서... 중간고사 기간엔 (수업이) 일찍 끝나니까. 오늘 게 마지막이에요. 저도 본업(공부)으로 돌아가야죠."그는 중간고사를 맞은 고등학교 3학년이다. 인근 카페에 내려 놓은 그의 가방 안엔 '2016 대학 입시 지원서'와 EBS 수능대비 '법과 사회' 문제집이 들어 있었다. 그는 공부할 시간도 빠듯할 텐데 언제 준비했냐는 질문에 "조금 촉박함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 상태로 대학을 가면 정말 '헬조선', 희망이 없다"고 한탄했다. 참여 동기에 덧붙여 김군은 '세월호'를 이야기했다.
"세월호 때도 느꼈던 거지만,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으니 정말 '가마니'로 아는 것 같아요. 이번에는 좀 움직여 보고 싶었어요."김군은 불현듯 자신의 '법과 사회' 문제집을 펼쳐 들었다. 그는 문제집 한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대한민국 헌법 31조 4항인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였다.
그는 "헌법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처음엔 설마 설마했다"면서 "여론이 이런데 정말 (국정화를) 할까, 미치지 않고서야. 근데 결국 되더라"라고 안타까워했다.
김군은 "아직 부모님께는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부모님께서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두고 혹여 문제가 생길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에 데려다 주시는 길에, 일부러 편의점에 내려달라고 했다"면서 "편의점에서 물 하나를 사서 통학길을 되짚어 올라오며 대자보를 붙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대자보를 붙일 때 어른들의 시선은 어떠하냐고 묻자 김군은 "하루는 아래 블록 버스 정류장에 (대자보를) 붙이는데 사제 군복을 입은 할아버지들이 보였다. 혹시나 해서 떨면서 붙였다"고 전했다.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어른도 있다고 했다.
"(대자보를 인쇄한) 인쇄소 주인 아줌마께서 '나도 읽어보고 싶다'며 한 장 더 뽑으시더라고요. 그럴 땐 뿌듯했어요.""출판사 바뀐다고 이성계가 고려 세운 게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