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사상 배운 우리, 왜 안 잡아 갔나요"

[거리에 나선 학생들 ②] 경기도 광명북고등학교 김영호군(가명)

등록 2015.10.20 11:24수정 2015.10.2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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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학생들은 거리 행진, 1인 시위, 대자보 부착 등의 방법으로 역사 국정교과서의 부당함을 알리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사회에 전하려고 합니다. - 기자말

"이번에는 움직여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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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북고등학교 김영호(가명) 학생이 19일 오후 경기도 광명 하안사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 철회를 촉구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있다. ⓒ 유성호


뉴발란스 책가방을 멘 남학생 한 명이 버스 정류장 한 편에 서서 검지 한 마디만큼의 크기로 스카치 테이프 4개를 뜯었다. 이윽고 정류장 벤치 중앙 벽에 준비한 대자보를 꺼내 조심 조심 모서리마다 테이프를 붙이고 돌아섰다.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무엇을 붙이나 흘깃 쳐다봤다.

"나는 역사학도를 지망하는 예비 사학도의 사명감과 교육의 주체인 학생의 양심에 발로(發露)하여 (중략)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 철회를 엄중히 요구하는 바이다."

19일 오후 4시, 자신이 살고 있는 경기도 광명에서 대자보 행동에 나선 김영호(가명, 광명북고등학교 3학년)군을 현장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 봤다. 그가 준비한 대자보는 총 5장. 4.19 혁명 선언문을 참고해 썼다고 했다. 지난주 금요일(16일)부터 통학 버스가 자주 다니는 곳 등 또래의 눈에 잘 띌 법한 곳을 찾아 붙여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처음에 두 장 정도만 할까 했다가 한 장 붙이고 나니까 할 만하더라고요. 촛불 집회도 참여하고 싶은데 학교 수업에 매여 있어서... 중간고사 기간엔 (수업이) 일찍 끝나니까. 오늘 게 마지막이에요. 저도 본업(공부)으로 돌아가야죠."

그는 중간고사를 맞은 고등학교 3학년이다. 인근 카페에 내려 놓은 그의 가방 안엔 '2016 대학 입시 지원서'와 EBS 수능대비 '법과 사회' 문제집이 들어 있었다. 그는 공부할 시간도 빠듯할 텐데 언제 준비했냐는 질문에 "조금 촉박함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 상태로 대학을 가면 정말 '헬조선', 희망이 없다"고 한탄했다. 참여 동기에 덧붙여 김군은 '세월호'를 이야기했다.


"세월호 때도 느꼈던 거지만,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으니 정말 '가마니'로 아는 것 같아요. 이번에는 좀 움직여 보고 싶었어요."

김군은 불현듯 자신의 '법과 사회' 문제집을 펼쳐 들었다. 그는 문제집 한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대한민국 헌법 31조 4항인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였다.

그는 "헌법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처음엔 설마 설마했다"면서 "여론이 이런데 정말 (국정화를) 할까, 미치지 않고서야. 근데 결국 되더라"라고 안타까워했다.

김군은 "아직 부모님께는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부모님께서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두고 혹여 문제가 생길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에 데려다 주시는 길에, 일부러 편의점에 내려달라고 했다"면서 "편의점에서 물 하나를 사서 통학길을 되짚어 올라오며 대자보를 붙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대자보를 붙일 때 어른들의 시선은 어떠하냐고 묻자 김군은 "하루는 아래 블록 버스 정류장에 (대자보를) 붙이는데 사제 군복을 입은 할아버지들이 보였다. 혹시나 해서 떨면서 붙였다"고 전했다.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어른도 있다고 했다.

"(대자보를 인쇄한) 인쇄소 주인 아줌마께서 '나도 읽어보고 싶다'며 한 장 더 뽑으시더라고요. 그럴 땐 뿌듯했어요."

"출판사 바뀐다고 이성계가 고려 세운 게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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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 행동에 나선 김군은 '역사학도를 지망하는 예비 사학도의 사명감과 교육의 주체인 학생의 양심에 발로하여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신민형 정치문화로 회귀하고자 하고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를 일삼는 정권의 전횡에 대한 빈기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 철회를 엄중히 요구하는 바이다'고 글을 적었다. ⓒ 유성호


사학과를 지망한다는 김군은 한국사 국정 교과서 추진을 과거 왕권 시대의 '사초 개입'에 비유했다. 그는 "<한국사> 수업에서 배우기도 했지만 옛날에도 왕들이 사초를 보려고 하면 '아니되옵니다'하고 말렸지 않나. (국정 교과서 추진은) 사초를 건드리겠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새누리당이 국정 교과서 추진 홍보를 위해 내건 플래카드 '김일성 주체 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학생들이 주체 사상을 배웠다는데... 그럼 우리 보고 '빨갱이'라는 것 아닌가요. 근데 그걸 알면서도 우릴 왜 안 잡아갔는지 모르겠어요."

김군은 최근 학생들의 국정 교과서 반대 행동에 대해 일부 교사들의 개입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그는 "학교에선 딱히 선생님이 관련해서 말씀을 하시는 건 없다, 판단은 우리 몫인데... 선생님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팩트'만 가르친다"고 전했다.

주변 친구들의 국정 교과서 반대 행동 대한 반응을 묻자 "응원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했다. 수능 학습 부담이 큰 학생들이 단일 교과서를 다수가 원한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군은 한국사 교과서에 담기는 '역사적 사실'을 그 이유로 들었다. 

"역사 교과서는 검·인정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국어나 영어 같은 경우엔 출판사가 다양하면 그 문제 안에 들어 가는 지문이 달라지니까 복잡해질 순 있는데. 역사 교과서는 출판사가 바뀐다고 이성계가 고려를 세운 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인터뷰 말미 그는 수시와 수능 준비 때문에 대자보를 더 붙이긴 힘들 수도 있다면서도 "SNS에서 잠깐씩이라도 알리는 일은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군은 자신이 준비한 마지막 대자보를 붙이고 테이프를 가방 앞주머니에 넣었다. 수험서가 든 가방은 한눈에 봐도 묵직해 보였다. 그는 가방을 고쳐 메고 인도로 나섰다. 다섯시까지 가기로 했다는 독서실로 가는 길이었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국정교과서 #대자보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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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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