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하면 황금, 제 아이디어랍니다"

[광명동굴, 폐광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⑦] 정소정 동굴문화팀장 ①

등록 2015.11.02 09:58수정 2015.11.0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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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소정 동굴문화팀장
정소정 동굴문화팀장윤한영

광명동굴 개발은 광명시 공무원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복지부동의 대명사였던 공무원들이 작심을 하면 정말 열심히 일하면서 빼어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를 만들어낸 것이다.

정소정 동굴문화팀장은 광명동굴 개발에 참여한 광명시 공무원 가운데 가장 변화의 폭이 넓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2월, 광명시청에서 보건직 공무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정 팀장은 20년 동안 보건소, 위생과 등에서 보건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그런 그가 2012년 9월, 광명동굴 개발 업무를 담당하는 테마개발과가 신설되면서 동굴문화팀으로 발탁됐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보건직 공무원이 문화예술 업무를 담당한다? 이런 전례는 없었다.

양기대 광명시장은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을 눈여겨보다가 직종과 상관없이 파격 발탁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정 팀장 역시 그런 케이스였다.

정 팀장을 추천한 사람은 최봉섭 테마개발과장이다. 광명시는 2010년 10월에 열린 '건강도시연맹 국제대회'에서 건강도시 정책을 제안해 우수계획상을 받았다. 당시 그 업무를 담당한 사람이 바로 정 팀장이었다. 광명시가 국제대회에서 상을 받은 건 정 팀장이 처음이었다.

보건직 공무원이 문화예술 업무를

 동굴 요정 아이샤와 쿠우의 이야기를 3D 영상에 담았다. 특히 아이들이 좋아한다.
동굴 요정 아이샤와 쿠우의 이야기를 3D 영상에 담았다. 특히 아이들이 좋아한다. 윤한영

이후 건강도시 추진 업무는 광명시가 추진하는 주요 정책이 되면서 미래전략실로 업무가 넘어갔다. 최봉섭 과장은 정 팀장을 미래전략실로 끌어올렸고, 정 팀장은 그때부터 미래전략실에서 일하게 된다. 최 과장은 열정적으로 일하는 정 팀장을 눈여겨봤고, 테마개발과가 신설되자 망설이지 않고 정 팀장을 추천한다. 그래서 테마개발과가 신설된 2012년 9월 21일은 정 팀장에게 있어 인생 전환기가 되는 날이기도 했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공무원은 명령(발령)이 떨어지면 해야 하거든요. 어디 가서 무슨 일이든 못 하겠나, 싶기도 했고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잖아요. 그런 심정이었죠."

돌이켜 생각하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문화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 없이 시작한 일이니 더더욱 그랬다. 그래도 정 팀장은 나름대로 원칙은 있었다. 동굴문화팀은 동굴 예술의 전당 공연과 행사를 주로 담당한다.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이기 때문에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은 다른 사람도 듣고 싶어 하고, 내가 보고 싶은 공연은 다른 사람도 보고 싶어 할 거라고 믿고 공연을 골랐고, 밀어붙였어요. 그게 어느 정도 맞아 떨어졌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테마개발과가 생기기 전에 광명동굴 문화예술 공연을 전담했던 변성수 예술공연팀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무슨 공연을 할 것인지, 출연자 섭외를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변 팀장에게 묻고 또 물었다.

 정소정 동굴문화팀장
정소정 동굴문화팀장윤한영

변 팀장은 정 팀장 대신 까다로운 출연자 섭외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정 팀장은 지금까지도 변 팀장을 고맙게 생각한다. 어떤 부탁을 하든 거절하지 않고 들어줬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업무에 수월하면서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는 게 정 팀장의 설명이다.

테마개발과가 신설됐을 때만 해도 광명동굴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본격적인 동굴테마파크 개발이 시작되지 않은 상황이라 걸음마 단계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기도 했다.

그래도 주말이면 광명동굴을 찾는 방문객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였다. 정 팀장은 이들에게 볼거리를 하나라도 더 제공하기 위해 동굴 밖에서 크고 작은 공연을 준비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한 사람이라도 더 광명동굴을 보러 올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부모와 함께 광명동굴을 찾은 어린이들을 위해 체험놀이도 준비했다.

그가 테마개발과에 온 뒤 처음 맞이한 가장 큰 행사는 2013년 6월 29일에 열린 '동굴 예술의 전당' 개관 축하공연이었다. 양기대 시장은 동굴 예술의 전당 개관에 엄청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니, 개관식을 담당한 정 팀장 입장에서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광명시 역사에 길이 남을 행사이기도 했으니 당연했다.

개관식은 정 팀장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만큼 보람도 큰 행사였다. 예술의 전당 무대에서 공연이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정 팀장은 가슴이 뿌듯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폐광에 저런 멋진 무대를 만들 수 있구나,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도 더불어 했단다. 정 팀장은 그때 처음으로 '기적'이라는 말을 떠올렸단다.

동굴 예술의 전당이 개관하면서 정 팀장 일은 늘어났다. 예술의 전당 무대에 올릴 공연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 팀장은 예술의 전당 무대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짜냈다.

 정소정 팀장은 예술의 전당 무대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짜냈다. 발레, 고전무용, 퓨전국악, 난타, 오카리나 독주, 클래식 협연, 갈라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정소정 팀장은 예술의 전당 무대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짜냈다. 발레, 고전무용, 퓨전국악, 난타, 오카리나 독주, 클래식 협연, 갈라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윤한영

발레, 고전무용, 퓨전국악, 난타, 오카리나 독주, 클래식 협연, 갈라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동굴문화팀 업무를 담당하면서 문화예술 공연에 눈을 뜨기 시작한 정 팀장은 자신이 알게 된 모든 장르의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아쉽게도 예술의 전당 무대에 올리지 못한 공연은 있다. 오케스트라 공연이다. 광명동굴은 내부가 너무 습하기 때문에 현악기 공연을 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동굴 예술의 전당은 또 다른 한계가 있다. 동굴 내부가 일 년 내내 12도라는 것이 장점이지만 단점도 된다. 한여름에도 처음에 들어갈 때는 시원하지만 20~30분 정도 지나면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진다.

그 때문에 동굴 안에 한 시간 이상 머물려면 두툼한 겉옷을 준비해야 한다. 동굴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을 준비할 때 이 점을 당연히 감안할 수밖에 없다. 공연이 50분을 넘으면 출연자나 관객이나 전부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정 팀장의 표현을 빌자면 '뼛속까지 추위가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연을 50분 이상 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그런 단점 때문에 예술의 전당 공연은 50분을 넘기지 않는 게 일종의 불문율이 됐다.

공연을 기획하면서 정 팀장이 가장 방점을 찍은 것은 동굴과 일체감을 이루는 것이다. 그가 기획한 공연이 동굴의 특성과 잘 어울렸다는 평가를 듣고 싶은 것이다.

"동굴은 아주 특별한 공간이잖아요. 또 동굴 예술의 전당은 우리나라에 딱 하나밖에 없는 무대구요. 그런데 동굴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공연이 다른 곳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공연과 같다면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여기에서만 볼 수 있거나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공연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금까지 그가 설정한 방향에서 크게 어긋난 것은 없었다.

동굴하면 황금이지, 그게 통했다

양기대 시장은 2014년 가을, 광명동굴 유료 전환을 결정한다. 폐광 개발 최종 목표가 유료 전환이었지만, 그래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가장 큰 우려는 누가 광명동굴을 돈을 내며서까지 보러 오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반대 목소리가 높고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양 시장은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당연히 광명동굴 유료 전환 업무는 동굴개발을 전담하는 테마개발과 몫이 됐다. 목표는 간단했다. 관광객들이 돈을 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내부 공간을 알차게 바꿔야한다는 것. 말은 쉽지만 절대로 간단하지 않은 아주 어려운 미션일 수밖에 없었다. 광명동굴 개발의 성패를 좌우하는 일이기도 했다.

테마개발과에 비상이 걸렸다. 각 팀마다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정소정 팀장이 이끄는 동굴문화팀도 동굴 내부에 어떤 콘텐츠를 넣을 것인가 고민해야 했다. 이때 나온 아이디어가 '황금'이다.

광명동굴은 한때 금, 은, 동, 아연 등을 캐내던 수도권 최대의 금속광산이었다. 1955년부터 1972년까지 '황금 52kg'을 캐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채굴을 시작했으니, 1955년 이전에는 더 많은 황금을 캐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광명동굴은 황금동굴이 되었다.
광명동굴은 황금동굴이 되었다.윤한영

 광명동굴에서 황금패가 인기를 얻고 있다.
광명동굴에서 황금패가 인기를 얻고 있다. 윤한영

정 팀장은 '황금'에 주목했다. 인간은 보다 많은 황금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모험도 마다하지 않는 존재가 아닌가. 황금을 찾아 모험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때 황금을 캐냈던 역사적인 사실과 접목해서 '황금'을 주제로 한 공간을 만들자.

특히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려면 황금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황금길, 황금의 방, 황금망치 아이샤, 황금패, 풍요의 여신이었다. 중국인들만 황금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관광객들도 황금에 관심이 많았다. 황금을 선택한 것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박'이었다.

광명동굴을 찾는 관광객들은 황금을 주목했다. 관광객들은 광명동굴에 여전히 캐낼 수 있는 황금이 있다고 믿었다. 사실이기도 하다. 광명동굴은 광물 자원이 바닥나서 폐광된 게 아니다. 여전히 금, 은, 동, 연 등의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지만 수도권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채광 허가가 나지 않는 것뿐이다.

광명동굴을 찾는 관광객들은 황금방에 잔뜩 쌓인 금화가 진짜 금인지 궁금해 한다. 아이샤가 들고 있는 황금 망치에 진짜 금박을 입혔다고 하니 확인하려고 손톱으로 긁어보는 사람들도 있다.

소원을 적는 황금패를 진짜 황금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떼어 가려고 해 도난방지를 위해 낚싯줄로 묶어야 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광명동굴을 찾은 관광객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 정소정 동굴문화팀장 ②로 이어집니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광명동굴 #정소정 #광명시 #양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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