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 횡포 그리고 '무기력'한 한국 정부

[소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비극 'Another Holocaust' 31화

등록 2015.12.24 10:30수정 2015.12.2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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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미나미아자부에 있는 주일대사관이 마비됐다. 밀려든 민원 때문이다. 민원의 성격은 분명하다. '전쟁이 일어나느냐'에서부터 '한국대사관도 폐쇄 되느냐' '일본 체류자와 한국 국적 재일교포는 어떻게 되느냐' '귀국을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에 이르기까지 재외 대한민국 국민이나 체류자들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대사관 직원들은 민원 접수 창구를 늘리고, 각종 방법을 통해 이들 불안을 줄이고자 했지만 힘이 부쳤다. 일부 체류자들은 일본 우익 보수집단 시위와 폭력에 지레 겁을 먹고는 귀국을 서두르고 있다. 월남 패망 직전 당시 사이공(현 호치민) 미국 대사관과 흡사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던 신오쿠보 거리 한국 음식점과 액세서리, 화장품 가게가 문 닫은 지 오래됐다. 이제는 임대 안내문만이 걸려 있다. 뿐만 아니라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 지역에는 재일교포들이 모여 사는 곳 가정집이나 점포에 몰래 불을 지르는 방화 사건도 흔한 일이 됐다. 지금도 대사관 밖에는 '더러운 한국인은 더러운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확성기에서 나오는 구호와 함께 수백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중이다.

성경 구절처럼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20세기 내내 민족주의나 종교를 내세운 온갖 폭압과 전쟁이 난무했다. 제국주의, 나치즘, 파시즘, 군국주의, 이로 인한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기간 중 한국전, 베트남전, 중동전쟁,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 IS집단 등 모든 집단적 폭력 뒤에는 그것을 부추기고, 그에 따른 이익을 얻기 위한 살육과 파괴가 잇달았다.

크게 봤을 때 일본의 미친 폭주도 갈등을 일으켜 편을 가르고 불안한 내부를, 곪더라도 결속시키기 위해 한국 혹은 한국인이라는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벌써 경험했다. 관동대지진 때 '우물에 조선인들이 독을 탔다', '조선인들이 일본 여인들을 강간했다'와 같은 유언비어로, 재판이나 최소한 절차도 없이 수 천 명을 마구 죽인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다가 정말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것 아니야?"
"에이, 아무리 그래도 전쟁이 일어나겠어?"
"언니, 지금까지 근무한 얼마나 됐죠?"
"벌써 14년째지. 왜?"

"그러면 그동안 봐왔을 것 아니에요. 이렇게까지 한일 관계가 나빠진 적 있었어요? 이 정도로 민원이 밀려들 정도로?"
"아니, 이런 일은 처음이야."
"그러니까요. 배우셨잖아요. 외교 관계가 아주 나빠질 때, 대사 소환, 공관폐쇄가 데드라인 아닌가요? 그 다음은 그야말로 전쟁 밖에 안 남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갈라고…."


대사관 직원들도 상황에 대한 인식이 엇갈린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가장 큰 문제는 수십 년, 혹은 몇 세대동안 일본 땅에서 태어나 자라고, 지금도 모든 생활의 터전이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들이다. 비록 한국 국적을 가졌지만 이들에게 일본을 떠난다는 것은, 한국 사람이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삶의 기반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로 떠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이민을 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온 가족이 몇 년을 고민하기 마련이다. 이민하는 나라에서 무슨 직업으로 먹고 살아야 할지, 집은 어떻게 마련할지,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할지 등등 삶을 다시 설계하는 크고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한일간 외교 관계가 나빠졌다는 이유로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는 것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날벼락인 것이다.

강정식 주일 대사는 고민에 빠져 잠을 설칠 정도다. 본국에서 뚜렷한 입장이 나오지 않아서다. 자신의 판단으로 사상 유래 없는 일본의 대사 소환과 공관 폐쇄라는 조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 위한 '예령(豫令)'인 것이다. 따라서 외교 관례에 따라 정부에서도 같은 조치를 취하든가, 아니면 모든 외교 수단을 강구해서 일본 정부 입장을 바꾸든 아니면 최소한 누그러뜨려야 한다.

그러나 본국으로부터는 일단 일본의 의중을 신속히 파악하라는 내용의 훈령만 내린다. 최악의 경우 일본 체류자는 물론 일본 정부가 공지한 대로 재일교포들의 한국 송환을 위한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럼에도 정부와 국회에서는 일본을 성토만 할 뿐 실질적인 일에는 손을 놓고 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기만 한다.

신문사 마감 시간을 앞둔 오후 대사관으로 도쿄 주재 한국 기자들이 몰려온다. 그러나 강 대사는 딱히 할 말이 별로 없다.

"일본 정부의 입장 변화는 없습니까? 따로 일본 정부와 접촉한 사실은요?"
"없습니다. 변화된 상황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제발 돌아가 주세요."
"본국에서는 별다른 반응은 없고요?"
"네. 아직까지는요."

"이렇게 재외 국민들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고, 재일교포들은 어떻게 할지 몰라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아무런 조치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달리 드릴 말씀 없습니다."

거의 폭언에 가까운 기자들 질문이 이어졌다. 기자들 드잡이를 뒤로 하고 강 대사는 말없이 자리를 뜬다. 관저로 돌아온 그는 피곤하기만 하다. 술을 꺼낸다. 무기력한 정부에 무기력한 대사 밖에 못 되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다.

취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이다. 신기하게 평소에 늘 지나치면서도 전혀 의식하지 못 했던 영유아 용품점이 미키 눈에 띈다. 알지 못할 힘에 이끌려 가게로 들어간다. 자신도 어릴 때 신고 입었을 듯한 앙증맞은 배냇저고리와 신발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분홍색 옷과 신발에 눈이 가는 것을 보니 뱃속 아기가 공주인 것 같다. 아니 K를 닮은 잘 생긴 왕자님도 괜찮다.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다 쓸쓸히 돌아선다. 혼자서 아기 물건을 산다는 것이 견디기 힘들어서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다. 결국 눈물이 번졌다. 핸드백에서 휴지를 꺼내 눈물을 닦는다. 핸드폰이 울린다. 아버지 이토 회장이다.

"네, 아버지. 네! 알았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

미키는 다케우치를 찾아간다. K 행방이라는 미끼에 걸려 다케우치가 드리운 낚싯바늘을 삼킬 수밖에 없다. 외무성 별청 건물, 창밖으로 멀리 왕궁이 보이는 다케우치의 사무실은 그의 품성만큼 차가운 분위기다.

"오랜만이군. 결혼이 깨진 다음 처음이네."

말에 딱딱한 뼈가 느껴진다.

"네, 그렇게 되네요."
"잘 지내셨나? 아무래도 요즘 정신없지? 뉴스가 쏟아지는 상황이라…."
"방송사 기자라는 직업이 늘 그렇죠."
"조사 파트에 있었으면 좋았을 거 아냐."

"어차피 제가 선택한 일입니다. 다른 말은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고요. K씨 행방이 파악됐다고요?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뭐가 그리 급해? 차 한 잔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야."
"아니, 차는 됐습니다. K씨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시면 됩니다."

다케우치의 표정에 힘이 들어간다. 잔뜩 뜸만 들이다가 내뱉는다.

"지금 그 친구,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야."
"그게 무슨 얘기에요?"
"수감돼 있어. 살인과 성매매, 국가안전보장법 위반으로."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죠?"

"말이 안 되는 게 아니야. 검찰이 명백한 정황과 증거를 확보한 범죄행위야. 그리고 그런 범죄행위는 처벌을 받는 게 당연한 것이고."
"그럼 지금 어디 있어요? 면회는 가능하죠? 현재 기소는 된 상태인가요?"

"한꺼번에 많은 질문을 쏟아내는군. 나라면 당연히 미키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고 면회도 주선하고 싶어. 하지만 검찰을 대신해서 법적인 관점에서 하나씩 답해주지.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새겨들어. 어디 있는지는 알려 주지 못해. 면회는 불가능하고, 기소와 관련된 사실 또한 알려줄 수 없어. 어디까지나 국가안전보장 관련 범법이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 사람은 무슨 국가안전보장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란 말이에요. 그래요. 만에 하나 범죄를 저질렀다고 칩시다. 그렇다 해도 변호인 접견권과 면회는 엄연히 법에서 보장한 권리, 아닌가요?"

"미키, 흥분하지 말고. 국가안전보장법에서 규정한 법령을 잘 읽어봐. 국가안전과 관련된 범죄에 대해서는 피의자의 권리가 상당 부분 유보될 수 있고, 면회는 물론 접견도 제한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내게도 권한이 없어."

"그럼,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했는지, 왜 구금돼 있는지 그거라도 알아야 되겠으니까, 그 사실에 대해서라도 말해 주세요."

"안 돼. 정 알고 싶다면 정식으로 정보공개 절차를 밟아야만 해. 그게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키는 느낀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척하지만 안으로는 빈정거리고 있는 다케우치의 속마음을. 미키는 다케우치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료타, 내가 기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그냥 지켜보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만일 K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 뱃속의 아기는 크게 슬퍼할 거예요. 당신과, 그리고 일본에 대해서, 일본 정부에 대해서 평생 미움을 가지고 살겠죠.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래요."

미키는 다시는 다케우치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매섭게 돌아선다. 남겨진 다케우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느라 몸을 떤다. 어머니를 자살에 이르게 한 아버지에 대한 실망보다, 자신의 삶을 재단하려 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보다 더 큰 감정의 해일이 다케우치를 뒤덮는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더 이상 되돌릴 가능성이나 미련은 없어졌다. 미키는 최후로 남은 괴물 다케우치를 벌거숭이로 만들었다. 이제는 다케우치라는 추악한 인물의 알몸만 남았다. 알량한 자존심에 마지막까지 생채기가 난,  다케우치의 더러운 감정은 파국만을 기약한다.

감정을 다루지 못하면 이성은 길을 잃는다. 미키의 향수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 다케우치는 오하라를 서둘러 찾는다. 핸드폰을 받지 않는다. 다시 전화한다. 아직도 받지 않는다.

"이 새끼까지 나를 무시해!"

애꿎은 핸드폰만 사정없이 벽에 내던진다. 깨지는 파열음이 다케우치의 심경이다. 그때 오하라가 성급히 들어온다. 다케우치는 다짜고짜 오하라의 뺨을 때린다. 영문을 모르는 오하라는 벙찐 모습으로 다케우치를 쳐다본다.

"왜 전화를 왜 안 받아!"
"다나카 단장님한테 지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오하라를 잡아먹을 듯한 다케우치의 표정이 갑자기 비굴하게 변한다.

"그래도 전화를 빨리 받았어야지."

머쓱해진 다케우치다. 방금 전 격해진 감정으로 오하라의 따귀를 때린 것이 너무 심했다는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사과할 줄 모른다. 그리고 다시 명령하는 상급자로 돌아간다.

"K가 어디에 있지? 참, 동북부에 있지. 거기 수용소 재소자들 내일부터 바로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 지역 복구 작업에 투입해."
"아니, 그건 좀 무리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가 문젠데?"
"일단 수용소부터 조금 거리가 있는 것도 문제고요. 사실 거기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 중 미결수가 많아서 노역을 시키면 안 됩니다."

다케우치는 검지 손가락으로 오하라의 가슴을 반복해서 찌르면서 어른다.

"수용소에서 거리가 멀면 관계 기관에 연락해서 차량 지원을 받으면 되고, 기결수든 미결수든 가리지 말고 노역을 시키라고 명령하면 되잖아."
차량 지원 요청은 하겠지만, 미결수 노역은 좀…."
"하라면 하지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그 인간들은 그래도 돼."

다케우치에게 법이나 규정은 자신에게 유리할 때는 무기나 방패가 되고, 불리할 때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한낱 거추장스러운 혹일 뿐이다.

오하라는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하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다케우치에게서 떠날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마치 대만계 이안 감독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서로 사랑을 불태우지만 산에서 내려와 서로의 생활로 담담하게 돌아가는 두 남자, 잭 트위스트(제이크 질렌할)과 에니스 델마(히스 레저)처럼. 오하라는 다케우치에 대한 미련을 한 겹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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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사랑의 감정에 휩싸였던 잭 트위스트(제이크 질렌할)과 에니스 델마(히스 레저)는 산에서 내려와 각자 생활로 돌아간다. ⓒ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10여 년 전 그 요원 훈련소에서 만나 자신만의 연인이라고 생각했던 젊은 날의 다케우치. 너무나 합리적이고 카리스마에 넘쳤던, 그리고 다케우치와 가졌던 설레고, 감미로웠던 기억을 봉인한다. 다케우치는 모든 것을 손에 쥐려 한다. 오하라는 자신이 다케우치 손에 쥐어지는 하나의 장난감이라는 것을 아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극히 망상적이고 맹목적인, 그래서 타인 불행을 당연히 여기는 다케우치의 숨겨진 연인 노릇과 극우 단체 앞잡이 간부 요원 노릇을 그만 두기로 결심한다. 그 대신 애타게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가엾은 미키에게 K 소식을 전해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야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슬픔이 하나라도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뿐이다.

(* 다음 편에 계속)
#대사 소환 #공관 폐쇄 #주일 한국대사관 #브로크백 마운틴 #국가안전보장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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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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