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씹었네" '악동'된 정당비례대표 투표용지

[생애 첫 개표 참관기] 민주주의를 직접 지키고 싶었습니다

등록 2016.04.14 08:57수정 2016.04.14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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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첫 개표참관이었다. 개표는 투표가 끝난 후에 진행되기 때문에, 낮 동안에 잠을 좀 자 두려고 애를 썼는데, 결국 한 잠도 못 자고 개표소에 나왔다. 오후 4시쯤 도착한 실내체육관 내부에는 모두 여덟 개의 조를 나눠서 개표를 할 수 있도록 테이블을 설치해 놓았다. 체육관 단상 위엔 검표와 투표 진행에 대한 감시를 위한 선거관리위원들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미리 안내해준 대로, 오후 4시 30분이 되자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에 의해 개표 절차에 대한 안내와 개표 사무원에 대한 교육이 진행되었다. 나는 이번에 개표 참관인 자격으로 참여했기에, 봉인되어 설치된 투표지분류기의 봉인을 해체하고 분류 프로그램을 확인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다(개표사무원은 직접적으로 투표지에 대한 분류/검표를 수행하고, 참관인은 개표 진행에 대해 모니터링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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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지분류기 작동확인 개표참관인의 확인 하에 투표지분류기의 봉인을 해제하고, 설치합니다. ⓒ 이창희


개표 부정과 관련,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투표지분류기는 소프트웨어 운영을 위한 노트북과 분류 센서영역, 그리고 분류된 용지가 나뉘어지는 분류영역으로 이루어진 장치다. 우선 봉인을 해체한 후, 전원을 켜고 운영을 위한 노트북을 켰다. 혹시라도 궁금하여 물었다.

"네트웍은요?"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컴퓨터 본체입니다. 아, 네트웍 카드 자체를 뺐습니다."

오후 6시가 되자, 국민의례와 개표사무원들의 공정 선거에 대한 선서가 있었고, 위원장의 개표 시작 선언으로 개표가 시작되었다. 투표를 마친 지역에서의 투표함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고, 개표참관인들은 지역별로 분류된 투표함에 대해 봉인 상태를 확인하도록 했다. 투표일 당일 투표함, 사전투표함, 재외국민 투표를 포함한 우편투표함까지 모두 도착한 후에서야 투표함 개함이 시작되었다.

개표는 개함부, 투표지분류기운영부, 심사/집계부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개함부는 봉인된 투표함을 열어, 국회의원선거투표와 정당비례대표투표로 분류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투표지 분류기를 통해 각각의 선택을 반영하여 분류된다.

투표지분류기의 초반 사용에서, 사용자의 미숙함이나 센서 감도의 최적화에 대한 오류가 있었으나 미분류표의 수가 과다하게 많이 분류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 문제없이 작동했다. 이렇게 분류된 투표지는 심사/집계부에서 최종 확인과 미분류 투표용지에 대한 수동 분류를 통해 최종 분류를 마치게 된다.


"기계는 실수하지 않아요. 사람이 실수를 하지."

선관위 관계자의 확신에 '정말 그런가'하는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어쨌든, 분류 결과를 최종 확인을 하는 단계가 있어 위안을 삼기로 했다. 이런 과정을 확인하는 중에도 위원장에 의해 최종 집계된 결과가 계속 발표되고 있었다.


"저희는 내일(14일) 저녁 8시까지만 끝내면 됩니다. 우리, 천천히 할까요?"

개함 및 분류에 속도가 붙질 않자 선관위 관계자분이 농담을 던지신다. 저는, '강력히' 반대하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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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반, 개함부 퇴근 사진 제일 왼쪽, 모든 투표함을 열고 분류를 끝내신 개함부 인원이 빠져나간 개표소입니다. ⓒ 이창희


밤 12시쯤 되자, 도착한 모든 투표함에 대한 일차 분류는 마무리가 되었고, 개함부 개표사무원분들이 퇴근하셨다. 체육관은 갑자기 온도가 1도쯤 내려간 것 같았고, 분류기의 투표지 분류하는 소리만 과장되어 울렸다.

관찰한 결과, 이번 개표의 최대 난제는 30센티미터가 넘는다는 '정당비례대표 용지'였다. 투표지가 너무 길고, 용지는 얇아서 자동 분류를 하다 보니 분류기 안에서 구겨지거나, 용지를 자꾸 씹어서 몇 번이나 멈추기 일쑤였다. 동일한 분류기에서 길이가 크게 차이가 나는 두 종류의 분류를 진행하다 보니 일어나는 일이었다. 어쨌든 이번 선거 개표의 제일 큰 악동이라는 타이틀은 벗을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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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의 정당비례투표지 분류 스물한개의 정당, 30센티가 넘는 투표지가 뱀처럼 꼬여서 분류가 쉽지 않습니다. ⓒ 이창희


"살살 달래봐. 윽박지르면 안 돼!"

정당 비례투표에 대한 분류가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분류기를 달래기 위한 유혹의 언어들로 웅성거린다. 14일 새벽 12시 반이 지나가니, 수월한 국회의원 투표지 개표는 거의 완료되고, '악동' 타이틀을 거머쥔 정당비례대표 투표지만 남았다. 계속 분류기가 씹어대는 통에 언제 끝이날지 모르겠다.

"이러다가 내일 바로 출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옆의 테이블에서 한 분이 툭 내뱉으신 말에 걱정스러워졌다. 새벽4시,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분류와 확인 작업이 결국 끝이 났다. 결국, 종료를 한 시간 정도 남기고 총 8대의 분류기 중 두 대가 과로사하는 통에, 스물한 개나 되는 정당 비례표를 수개표로 전환하는 '고난'까지 선사해 주었다(아무래도, 길이 차이가 너무 큰 두 개의 투표지를 한 기계에서 수용하도록 운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였다).

솔직히 이번 참관은 '뭐라도 해야'할 것 같은 사명감으로 신청했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는데, 정말 꽃으로 대우받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혹시라도 절차상 의심스러운 것은 없는지 확인해야겠다는 걱정도 있었다.

뭐, 단 한번의 참관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겠지만, 어쨌든 나는 자신감을 갖고 간다.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의견을 제대로 지켜내기 위해 눈을 부릅뜬 시스템이 있음에 안도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참여한다면 충분히 지켜낼 수 있는 제도라는 믿음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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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4시 개표종료 드디어, 개표가 종료되었습니다. 아, 끝나지 않을 줄 알았더니, 결국 끝나네요. 고생하셨습니다! ⓒ 이창희


이번의 선거는 우리 국민의 위대함에 대한 자부심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선거라는 이벤트에 대해 국민의 감시와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배울 수 있었다.

우리, 계속 감시하자. 권력이 우리를 감시한다고 숨어들지만 말고, 우리가 권력을 '제대로' 감시하여 사회가 '제대로' 동작하게 하자. 기분 좋은 피곤함이다.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새벽5시. 투표일 다음날도 쉬게 해 주시면 좋겠지 말입니다!
#2016 총선 #개표참관인 #투표는 참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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