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피해자 추모하는 시민들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이희훈
성인이 되어 교복 대신 원하는 옷을 입고 자유롭게 밤늦게까지 술을 마실 수도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자유의 대가로 수많은 날을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기를 소망해야만 했다. 평소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지인이 술에 취해 나를 만질 때,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두울 때, 날씨가 더워 반팔을 꺼내 입은 날 내 상반신을 빤히 쳐다보는 할아버지를 마주쳤을 때, 나는 오늘 하루 행운까진 없어도 되니 나쁜 일만은 일어나지 말라고 소망했다. 최근엔 내가 가는 화장실에 '몰카'가 없기를 소망하기도 했다.
나는 특별히 '예쁘거나 매력 있는' 여자가 아님에도 자주 이렇게 소망했다. 그러니까 나와 같은 나이의 그녀 역시 비슷했을 것이다. 호들갑 떠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서 말하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면 여자라는 이유로 자유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이상하다.
이런 식으로 나는 23년을 살아남아 왔다. 그녀의 23년이라고 뭐가 그렇게 크게 달랐을까.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아 왔던 그녀가 죽었다. 17일 새벽 1시, 번화가에서 남자친구를 만나다 잠시 들른 화장실에서 '여자라서' 죽었다. 내가 방충망과 잠금장치가 있는 안전한 원룸에서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잘 준비를 할 때, 나와 비슷한 길을 걸어온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죽어 버리고 말았다. 죽임 당하고 말았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삶을 살고 있다.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던 한 '사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요인으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내가 안전한 원룸에서 잘 준비를 하던 17일 새벽 1시의 일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지난 겨울, 방충망과 잠금장치가 있는 바로 그 안전한 원룸의 입구에서 나를 자신의 여자친구로 오인한 남자에게 붙잡힌 적이 있다. 그러므로, 참으로 우연히, 나는 그녀가 되지 않고 살아남는 중이다. 참으로 우연히.
그녀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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