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뗄 수가 없다, 이 작가의 소설

[한국소설이 건네는 이야기 23] 정유정의 <종의 기원>

등록 2016.06.17 08:43수정 2016.06.17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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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악' 하면 아돌프 아이히만이 떠오릅니다. 나치 전범으로 히틀러 치하에서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던 친위대 장교였지요. 악을 이해하는데 있어 아이히만은 꽤 중요한 존재입니다. 악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관점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거든요.

재판에 선 아이히만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인 악인이라고 하기에 그는 너무 평범해 보였거든요. 딱히 악질적인 면도 없었을 뿐더러 순종적이기까지 한 아이히만에게서 한나 아렌트가 찾은 건 '악의 평범성'이었습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도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거였지요.


애초에 '괴물'로 태어난 자만이 '괴물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사람들은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발견에 동의하지 않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렇다는 건, 평범한 우리도 악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진화 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도 <이웃집 살인마>라는 책에서 '악'과 '평범함'을 같은 줄에 놓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평생을 가도 살인을 하지 않지요. 그렇더라도 우리 모두의 DNA에는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력이 내재되어 있다"고 데이비드 버스는 말합니다. 이러한 잠재력이 발현되면 평범한 사람도 언제든 살인자가 될 수 있다는 거지요.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살인은 그 자체로 훌륭한 생존 전략"이었고, 그 결과 우리의 DNA에는 이 훌륭한 생존 전략이 박히게 됐다는 겁니다. 살인을 통해 생존에서 우위를 점했던 우리 조상들 덕분에 우리 모두는 악인이 될 가능성과 선인이 될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게 된 셈인데요.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선인이 될 수 있다는 이러한 생각. 역시 불편하지요.

그래서 소설가 정유정은 본인의 이번 소설 <종의 기원>이 누군가에겐 다소 불편한 소설로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소설 속 주인공 유진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가 바로 우리의 본성 안에 잠들어 있는 악을 응시하자는 거였으니까요.

평범했던 청년이 사이코패스로 


a  책표지

책표지 ⓒ 은행나무

<종의 기원>은 '악인의 탄생기'입니다. 평범했던 한 청년이 일련의 사건을 거쳐가며 본인이 사이코패스라는 걸 각성한다는 게 줄거리입니다. 줄거리는 꽤 단순하고, 등장인물 또한 단출합니다. 그에 반해 긴장감은 굉장합니다. 정유정 작가의 다른 소설들처럼 이 소설 또한 한번 읽기 시작하면 꼭 끝을 봐야 할 정도로 강력하기도 합니다.

기존 소설들에서도 줄곧 악인을 등장시켜왔던 정유정 작가는 이번 소설에선 아예 악인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1인칭 시점으로 사이코패스의 생각을 따라갑니다. 사이코패스가 세상과, 사건과, 타인을 어떤 식으로,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이 독자를 난처하게 하기도 합니다. 책을 다 읽었을 때 사이코패스를 연민하게 되는 이상현상이 벌어지기도 하니까요(제가 그랬습니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걸려든' 겁니다. 여기서 '그럴 수도 있었겠다'에 해당하는 게 '살인'이거든요.

사이코패스는 거짓말과 자기합리화의 귀재라고 합니다. 살인을 하게 된 그럴듯한 명분을 뚝딱 잘도 만들어낸다고 하네요. 사실 어떤 행동을 해놓고 그 행동이 옳은 행동이었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건 우리에게도 꽤 쉬운 일이잖아요. 일상생활을 하며 얼마나 자주 자기합리화를 하곤 하나요.

소설 속 유진은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1%에 해당하는 포식자입니다. 뇌 편도체에 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편도체는 감정과 관련된 학습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의 일부입니다. 얌전하고 침착하게 보이는 유진의 성격은 실은 바로 이 부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그렇게 보였던 것뿐이지요.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유진에겐 타인을 공감하는 능력 또한 없습니다. 유진이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은 오로지 "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일뿐입니다. 이로우면 남기고, 해로우면 해치우는 것. 유진의 엄마는 어느 날 이런 일기를 남깁니다.

"나는 유진에게 이로운 존재일까, 해로운 존재일까."


유진 엄마와 이모는 유진이 스물여섯의 건장한 청년이 될 때까지 유진이 사이코패스라는 사실을 용케 숨깁니다. 유진은 스물여섯 해를 착하고 순한 모범생 아들로 살아가게 되지요. 그러다 어느 날 피범벅이 된 채 깨어난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거실로 나간 그런 유진의 눈에 들어온 건, 피 웅덩이. 웅덩이 안엔 누군가의 발이 놓여 있습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유진의 머리는 복잡해집니다. 유진의 각성이 시작됐습니다.

우리가 유진을 통해 악을 응시해야 하는 이유를 정유정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나아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 본문 중에서


<이웃집 살인마>에서 데이비드 버스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살인의 기저에 있는 심리 회로를 깊이 이해하고 그것의 발현을 막을 수 있는 환경을 설계함으로써 원칙적으로 살인을 막을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악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악을 이해하는 것일 겁니다. 우리 안의 악한 본성을 말이지요.
덧붙이는 글 <종의기원> <정유정/은행나무/2016년 05월 14일/1만3천원)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 2016


#정유정 #종의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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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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