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손' 차별 금지에 걸린 시간, 70년

[짬내어 그림책 읽는 교실4] 마거릿 H. 메이슨 글, 플로이드 쿠퍼 그림 <할아버지 손>

등록 2016.07.08 11:34수정 2016.07.0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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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탄광마을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4학년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시간, 수업 틈틈이 짬을 내어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림책 같이 읽으며 나온,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합니다. - 기자말

"조지프야, 이 할애비 손 좀 보렴."


하얀 뿔테에 갈색 베레모를 쓴 노인이 손자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른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손끝을 바라본다. 마디에 깊게 주름이 진 노인의 손가락은 조지프라 불린 꼬마의 하얀 신발끈을 가리키고 있다. 신발끈을 맨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할아버지는 옛날에 자기가 두 구멍씩 나란히 지그재그로 끈을 꿰어 야무지게 리본을 맸다고 자랑한다. 아직도 아이들에게 운동화 끈 매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다고 외치는 늙은 남자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넘친다.

끈 없는 슬리퍼를 만지작 거리던 명규가 불쑥 외쳤다. 아빠한테서 리본 묶는 법을 배웠다고. 우쭐거리는 아랫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지기 싫어하는 현주가 나선다. 할머니가 솔로 운동화를 빡빡 씻어, 햇볕에 말리면 자기가 직접 신발끈을 맬 수 있다고 했다. 앞줄에 있던 연호가 아직 끈 묶기에 자신이 없다고 하자 가르쳐주겠단다. 남에게 알려줄 무엇이 있는 아이의 얼굴은 당당하다.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조지프야, 이 할애비 손 좀 보렴."

처음과 똑같은 대사. 하얀 앞니를 환하게 드러낸 할아버지는 조지프를 무릎에 앉히고 피아노를 친다. 그는 어린 손자에게 묻는다. 내가 왕년에 건반 두드리면서 봄날 제비들처럼 지지배배 봄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아냐고.


"진짜요?"
"그럼, 그렇고 말고."

껄껄 웃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신명나는 피아노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학교 끝나고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진희가 신기해했다. 어떻게 할아버지가 피아노를 가르쳐줄 수 있지? 궁금증을 안고 책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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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 앞에서 멋드러지게 카드 묘기를 부리는 할아버지 ⓒ 꿈교출판사


"조지프야, 이 할애비 손 좀 보렴."

뭘 또 보라는 것일까? 이번에는 트럼프다. 노련한 마술사는 두툼한 손으로 좌르르 좌르르 카드를 섞어 냉큼 에이스 카드를 뽑아낸다. 손주는 밤하늘 불꽃놀이라도 마주한 양 흐뭇하게 카드 넘어가는 장면을 지켜본다. "우와~" 유희왕 카드놀이를 즐겨하는 강준이 입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심드렁하게 앉아있던 민오의 한 마디.

"야, 우리 아빠는 화투로 딱딱 소리도 낼 줄 알아."
"흔들고, 쓰리고, 피박!"

저런 건 안 가르쳐줘도 어떻게 저리 잘 알까? 그래. 어쨌든 우리도 그림책에 나오는 할아버지에게 뒤지지 않는 엄마 아빠가 있다. 난데없이 도박 얘기로 교실이 시끄러워져 잠시 추스르고 다음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쌤, 아마 이럴 걸요? 조지프야, 이 할애비 손 좀 보렴."

종요의 예상은 적중했다. 할아버지는 팔꿈치 위까지 소매를 걷어붙였다. 조지프는 경험 많은 타격 코치의 도움을 받아 변화구를 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다. 시선은 날카롭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여차하면 하늘 높이 날아가는 제트기보다도 빠르게 커브 볼을 쳐낼 기세다. 홈런 볼을 치는 것까지 알려줄 수 있는 이 할아버지의 재능은 어디까지일까?

"여러분, 이 다음 장을 펼치면 무슨 대사가 나올까요?"
"조지프야, 이 할애비 손 좀 보렴!"

척하면 삼척, 안 봐도 비디오다. 우렁찬 합창으로 열어젖힌 다음 장인데 어째 이상하다. 젊은 날의 할아버지가 마대 자루를 쥐고 창 너머로 빵 만드는 광경을 훔쳐보고 있다. 호기롭게 새로운 기술을 소개해줄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흰 빵 공장에서 빵을 굽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묻는다. 옛날에 빵 공장에서 일했지만 반죽을 만지지 못했다고. 오직 바닥을 쓸고 닦고, 포장을 하고, 트럭에 싣는 일밖에 못했다고 할아버지는 고백한다.

흰 빵 공장 사장들이, 사람들은 검은 손으로 만진 흰 빵을 싫어한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뜻밖의 상황에 아이들 눈동자가 커진다. 고개를 갸우뚱한다. 피부색으로 다른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는 우리 반 친구들은 그림책의 이런 전개가 낯선가 보다. 전혀 상관관계를 못 찾겠다는 표정이다. 고학년 책을 벌써 읽고 있는 원석이가 미국은 옛날에 인종차별이 심했다고 또박또박 설명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를 해방시켰다는 지식도 덤으로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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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0년대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있었던 실화이다. ⓒ 꿈교출판사


조지프 할아버지의 회상은 계속된다. 공장 노동자들은 단체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검은 손끼리 손을 맞잡고 '검은 손 차별'을 막는 법을 만들려고 한다. 팻말을 들고 거리에 나서고,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함께 노래를 부른다. 저거 시위하는 거냐고 인성이가 물었다. 맞다고 했다. 불과 60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1964년 차별 금지법을 통과시키기까지 흑인들이 70년간 피를 흘렸노라고 대답했다. "70년이요?" 듣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어온다.

시대가 변했다. 11살짜리 우리 반 꼬맹이들은 미국 대통령하면 오바마밖에 모른다. 흑인이 미국 정부 수장을 맡고 있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세대다. 하긴 2009년부터 임기를 시작했으니, 2006년 생인 4학년들에게 오바마가 떠오르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미국은 흑인이 대통령을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크고 작은 인종차별이 남아있다고 하자, 영인이가 우리나라는 흑인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그래 흑인 문제는 덜하지. 근데 있잖아. 한국도 다인종 사회야."

울산 고향집 얘기를 해줬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 셋방을 놓았는데, 이주 노동자들이 몇몇 들어와 살았다. 보증금 30만 원에 월세 7만 원을 못 내서, 방세가 밀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비슷한 일을 하는 한국 노동자보다 더 오래 일하고, 적은 급료를 받았다. 2004년에 유행한 개그였던 '블랑카'의 "사장님 나빠요"의 현실이 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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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폭소클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개그맨 정철규 ⓒ KBS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있던 승주는 이주 노동자가 돈을 못 벌어 불쌍하다고 했다. 또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했다. 학생들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비주류의 삶은 주목받지 못한다. 신경써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지나치기 일쑤다.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무관심은 비단 이주 노동자만의 문제일까? 일상에서 차이로 인한 차별은 흔하다. 여성, 어린이, 장애인, 성적 소수자... 시간이 부족하여 '차이'에 기반한 '차별'의 예시를 모두 다룰 수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과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사회적 고민거리를 짚어나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조지프에게 말을 건네는 할아버지 마음이 이랬으려나?

다시 <할아버지 손>으로 돌아가 보자. 조지프가 할아버지에게 직접 전수받지 못한 기술이 딱 하나 있다. 검은 손은 허락되지 않았기에, 빵 반죽을 만지고 굽는 일이다. 다른 건 몰라도 빵은 조지프가 할아버지보다 한 수 위다. 자유와 권리가 보장된 시대에 태어난 손자는 빵 반죽 만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조지프가 두 손으로 직접 만든 먹음직스러운 빵을 보며 할아버지는 읊조린다.

"조지프야, 넌 이제 뭐든지 할 수 있다."

환하게 미소짓는 손자를 응원하며 할아버지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삶은 행복하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책 읽어주던 내 손을 들여다 본다. 이 손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생각한다. 잠깐 사색에 빠진 나를 아이들이 쳐다본다. 앉아있는 자세도, 눈빛도 제각각이다. 그래 맞다. 적어도 사소한 차이를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아이들을 차별하지 말아야겠다.

할아버지 손

마거릿 H. 메이슨 글, 서애경 옮김, 플로이드 쿠퍼 그림,
꿈교출판사, 2013


#그림책 #차별 #인종차별 #흑인 #할아버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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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사입니다. <선생님의 보글보글> (2021 청소년 교양도서)을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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