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노모가 칠순 훈장에게 보낸 성탄카드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2부 교단일기 (15)

등록 2016.12.26 17:28수정 2016.12.2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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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장의 성탄카드


교단에 선 이래 해마다 연말연시 무렵이면 성탄카드 및 신년 연하장으로 우리 집 우편함은 늘 가득 찼다. 나는 이밖에도 그런저런 일로 우편물을 많이 받는 사람으로 우편집배원들에게는 유명인사였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하더니 이제는 연말에 이전과 같이 나에게 성탄카드와 연하장을 보내는 이들은 팍 줄어들었다.

나는 이런 현상을 섭섭해 하지 않고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현상의 발단은 통신수단 발달로 굳이 카드를 사서 일일이 인사말을 쓰고, 우체국에 가서 돈을 들여 부쳐야 하는 수고를 소셜미디어(SNS)가 대행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 관계란 세월이 흐르면 점차 멀어지기 마련이다.

그걸 '염량세태'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게 지극한 자연현상이다. 그리고 상대를 탓하기 전에 내가 그분들에게 먼저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나는 교단을 떠난 후 곧장 삶의 근거조차 버리고 강원산골로 내려왔다.

이곳으로 온 지 벌써 12년이 지난 지금 그런 현상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예로부터 '거자일소(去者日疎)'라 하여, 인간관계는 날이 갈수록 자연스럽게 잊히기 마련이다. 그래야 사람은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도 수십 년이 지난 여태까지 해마다 잊지 않고 굳이 예쁜 성탄카드에 이런저런 사연을 담은 카드를 강원 산골까지 보내주는 이가 몇 분이 있다. 올해는 현재까지 두 분으로부터 귀한 성탄카드를 받았다.


"성탄절과 새해를 맞이하여 이 땅의 모든 곳에 평화와 희망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이희호

"선생님, 금년 겨울날씨도 고르지 못하다고 하니 특히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봄을 기다리십시다. 할아버지 숙제(졸저 <허형식 장군> 출판 일)를 잘 마친 손자에게 큰 축하와 찬사를 보냅니다. … 묵은해 마무리 새해맞이 잘하시기 바랍니다." - 김영숙


한 분은 아흔을 훌쩍 넘으신 학부모 이희호 영부인이시고, 다른 한 분은 여든 넘으신 전 이대부고 김영숙 교장선생님이시다. 두 분은 여태 아날로그 세대로 시대조류에 편승치 않고 옛 방식대로 성탄 및 연하인사를 보내주셨다.

[관련 기사] 이희호 여사에게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올 연말에 받은 두 장의 성탄카드(왼쪽 이희호 영부인이 보낸것, 오른쪽 김영숙 전 이대부고 교장선생님이 보낸 것).
올 연말에 받은 두 장의 성탄카드(왼쪽 이희호 영부인이 보낸것, 오른쪽 김영숙 전 이대부고 교장선생님이 보낸 것). 박도

이심전심의 눈빛

사실 대부분 학부모와 교사관계는 학생이 졸업하면 끊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분과 나의 인연은 좀 특수하다. 나는 그분의 아들 김홍걸 군에게 2년 동안 국어를 가르쳤는데 담임은 한 번도 맡지 않았다. 1979년 김홍걸 군이 이대부고 1의 2반일 때는 나는 바로 옆 반인 3반 담임이었고, 그가 고등학교 2학년 재학 당시 1반일 때도 나는 바로 옆 반인 2반 담임이었다.

그때 그는 대통령의 아들이 아니라 가택연금을 당한 정치인의 아들이었고, 그 후에는 사형수의 아들이었다. 그 시절 그와 내가 수업 중에 마주치면 "용기를 잃지 말라" "선생님, 고맙습니다"라는 이심전심의 눈빛만 서로 오갔을 뿐이다.

아마도 그 어머니는 그런 깊은 사연을 잘 알고 아흔을 넘긴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며 해마다 연말이면 특별히 친필로 봉투를 써서 내가 이사하는 곳마다 성탄카드를 보내주셨을 것이다(이즈음은 고령으로 비서들이 워드로 친 주소다).

 이희호 <동행> 출판기념회에서 해후(2008. 11. 12.)
이희호 <동행> 출판기념회에서 해후(2008. 11. 12.)박도

나는 두 분의 카드를 우편함 상자에 넣으면서 지난날 카드를 이제는 정리하고자 추스르는데 1985년 한 제자에게서 받은 게 눈길을 끌었다. 그 성탄카드는 나를 잠시 추억속으로 빠트렸다.

그는 1983학년도 입학한 박아무개 담임 반 학생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반 학생 가운데서 가장 먼저 외웠다. 그는 신입생 예비소집 일에도 가장 늦게 등교했고, 입학식 날에도 지각했다. 

그는 입학을 한 뒤에도 출결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늘 초점을 잃거나 뭔가 쫓기는 듯한 불안·초조함이 보였다. 입학 후 보름이 지났을 무렵, 그 대신에 그의 아버지가 낙담한 얼굴로 내 자리로 찾아왔다.

"선생님, 제 집 놈이 서대문경찰서에 있어요. 선생님이 좀 구해주세요."

'돌아온 탕자' 이야기

나는 수업시간을 조정한 뒤 아버지와 서대문경찰서로 갔다. 그는 형사과 딱딱한 나무의자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었다. 그는 애써 나를 외면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마지 못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체념어린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경찰서에 들어설 때와는 달리 어떻게 하든 그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학교에서 잘 선도하겠습니다."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담당 형사는 우악스럽게 생긴 인상과는 달리 그를 변호하며 내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나는 그 형사의 그 한 마디에 평소에 가졌던 형사들에 대한 좋지 못한 선입견을 말끔히 씻었다. 그가 왜 서대문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졌는지 굳이 이 글에서 까발리지 않겠다. 그는 경찰서에서 벌을 받을 만큼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나의 선도 약속 보증으로 그날 곧장 경찰서에서 훈방됐다. 나는 돌아오는 길 그에게 아무 염려치 말고 다음날부터 등교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등교치 않았다.

그 며칠 후 신촌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는 그의 아버지가 비린내를 풍기는 옷차림으로 학교에 왔다. 아버지는 나에게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선생님! 제 집 놈 좀 구해주세요. 제가 며칠을 두고 달래기도 하고, 몽둥이질도 했지만 끝내 학교를 다니지 않겠답니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그 녀석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내가 자기 집으로 찾아온 줄 알면서도 굳이 자리를 피해 있었다. 아버지·어머니가 끌어내다시피 내 앞에 앉혔지만 그는 계속 고개를 돌린 채 내가 묻는 말에도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1시간여 이런저런 얘기로 설득했다. 오랜 침묵 끝에 나온 그의 첫 말이다.

"선생님, 저 학교 그만두겠습니다."

나는 다시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온, 한때 가정사정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쓰라린 얘기도 했고, 너의 가운데 이름 자(字)는 나의 아버지 항렬 자(字)로 너는 나의 아저씨뻘이 된다는 비굴할 만큼 최후의 간절한 말을 남긴 채 그 집을 떠나왔다.

이튿날 그는 등교했다. 나는 학급 학생들에게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를 따뜻하게 맞자고 호소했다. 반 학생들도 모두 호응했다.

그는 마침내 학생 본연의 자세로 돌아왔다. 그의 변신은 참으로 놀라왔다. 쉬는 시간이면 교무실로 찾아와 여러 교과 선생님에게 자기가 모르거나 이해되지 않는 점을 뻔질나게 질문했다. 그해 학년말 진급사정회 때 그의 이름이 성적우수자 명단에 끼어 있었다. 그 이듬해 연말 그는 우리 집으로 성탄카드를 보냈다.

 남설악 주전골 계곡
남설악 주전골 계곡박도

내 그릇에 맞게 살다

2004년, 나는 정년을 5년 남긴 채 조기 퇴직한 뒤 그동안 생활근거지였던 서울을 떠나 생면부지의 강원도 산골마을로 내려왔다. 몇 해 전 우리 부부는 남설악 오색의 한 숙소에서 1박을 한 뒤 이튿날 아침 주전골 계곡을 산책했다. 그 숙소는 당시 사학연금공단에서 운영했기 때문에 사립학교 전 현직 교직원들이 많이 이용했다. 다시 마을로 내려오는데 한 주민이 우리 부부에게 정중히 아침인사를 했다.

"교장 선생님,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근데, 저는 교장은 아닙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그럼 교감 선생님이셨군요."
"아닙니다. 평교사로 퇴직했습니다."

그분은 내 말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은 듯, 멋쩍게 우리 부부의 몰골을 아래위로 훑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2014년 9월 20일, 전남 해남에서 열린 '민족시인 김남주 20주기 추모문화제'에 참석했을 때다. 그날 밤 해남유스호텔 강당에 마련된 뒤풀이 모임에서는 전국에서 찾아온 100여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의 친교모임이 있었다. 그때 사회를 본 전남 함평 출신의 이승철(전 작가회의 사무총장) 시인은 굳이 나를 가장 먼저 소개를 했다. 아마도 그 모임에서 가장 연장자로 보였기 때문이리라.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 퇴직한 박도 선생님은 …."

나는 얼른 손을 치켜들고 흔들었다. 그러자 이 시인은 얼른 정정했다.

"교감 선생님으로 정년퇴직한 …."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회자에게 다가가 마이크를 양도받은 후 잘못 소개된 점을 정정했다.

"제가 근무했단 학교는 이화여자고등학교가 아니고 이대부고이며, 저는 평교사로 정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기 퇴직했습니다."

그날 참석한 회원 소개가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서 그 지방의 일품인 전어회에 곁들인 그 지방 별미인 홍어회를 먹으면서 막걸리 술잔을 나누는데 이승철 시인이 물었다.

"선생님, 30년이 넘게 교단에 섰으면서도 어찌 평교사로만 계셨습니까?"
"아우님! 그렇게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기에 글을 쓰도 이 시대에 관심도 없는 의병이나 독립지사 언저리를 헤매지 않소."

그 말에 좌중은 박수로 이실직고한 못난이의 허물을 덮어줬다. 사실 나도 재직 중 한때 그런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근무했던 학교(이대부고)는 근원적으로 교장은 될 수 없었고(교장은 사범대학 교수들의 보직이었음), 교감 보직도 붙박이라서 대부분 교사들은 평교사로 끝나는 처지였다.

 김남주 시인 20주기 추모문화제 뒤풀이장에서 기자가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왼쪽 이승철 시인, 오른쪽 기자).
김남주 시인 20주기 추모문화제 뒤풀이장에서 기자가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왼쪽 이승철 시인, 오른쪽 기자).박도

어떤 공채시험

1990년대에 이르러 웬일인지 서울시교육청에서 각 사립학교에 장학사 공모 신청서를 내려 보냈다. 그때 나는 교육경력이나 부장 경력이 장학사 공모 자격에 부합하기에 신청을 했다. 서울시교육청 장학사로 발탁된다면 본청 근무 얼마 후 일선학교 교감으로, 이후 교장으로 승진하는 발판이 되는 길이었다. 그래서 응시과목인 교직이론 등 필기시험 대비로 대학시절 이후 덮었던 교직이론 수험서를 서점에서 사다가 밤늦도록 형설의 공을 들였다.

시험 날 지정 학교에 가서 필기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그날 시험문제는 비교적 내가 아는 문제만 출제된 탓으로 마음 속으로 합격할 것 같은 그런 기대가 부풀었다. 하지만 그날 퇴실할 무렵에 시험 감독관(본청 장학사)이 응시자들에게 한 마디 했다.

"합격자 발표는 개별적으로 통보합니다. 교육청으로 방문 및 전화 문의를 일체 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날 시험장을 벗어나며 그 말을 곱씹자 꼭 들러리를 선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공채시험 결과를 개별적으로 알리며, 합격 여부 및 누가 합격했는지조차 문의조차 하지 말라니 이게 무슨 민주국가요, 공정사회인가? 사실 나는 그날 공채시험에서 누가 합격했는지 오늘까지 모르고 있다. 

혹자는 나의 이야기에 제 실력은 모른 채 불평불만하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공채라고 널리 광고했다면 정정당당하게 그 합격자를 밝히는 게 근본 취지에 맞는 공정사회가 아닌가. 만일 미리 장학사를 내정해 놓고 겉으로 공채인 양 무늬만 공개형식을 취한다면 그게 무슨 공정사회인가. 그것도 다름 아닌 교육기관에서. 누군가 이미 언급했지만 우리 사회 개혁대상 0순위가 교육계라는 점에 나는 그 이의를 붙이고 싶지 않다.

나는 그 시험 이후 다시는 그런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제 인생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내 지난날을 회고해 볼 때 나는 참으로 평교사로 33년을 근무한 게 자랑스럽고, 무척 다행스럽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평교사로 지낸 그게 내 분수에 맞았으며, 내 그릇의 크기가 그 정도였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그에 대한 분노를 승화시켜 대신에 서른아홉 권의 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은, 학문은 분노와 역경 속에서 고고(孤高)히 탄생치 않는가.

교육자에게는 어떤 지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쳤느냐, 그리고 얼마나 어린 영혼들에게 진리를 진실을 깨우치게 하였느냐가 가장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그리고 교육자의 인생 성공여부는 제자들이 평가할 거라는 사실을 교단을 떠난 뒤에 더욱 절실히 깨닫고 있다.

 만추의 남설악 멧부리
만추의 남설악 멧부리박도

어느 대학 총장

며칠 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청문회를 잠시 지켜보는데 한 국회의원이 전 이화여대 총장에게 질문했다.
 
"누가 대학에 경찰병력을 불러 들였습니까?"

전직 총장은 구구한 변명을 늘어놨다. 그러자 국회의원의 질책이 화살처럼 쏟아졌다.

"부정입학에 연루된 교수들은 대학을 떠나라."
"부정입학 학생은 있는데 부정입학을 시킨 이는 없다. 그러면 유령이 그 학생을 입학시켰는가?"

또 다른 한 국회의원은 백성들을 대변하여 일갈했다.

"그 대학교은 도가니다."

나는 당사자도 아니지만 한때 그 대학 부속학교 미관말직에 근무했던 사람으로, 그 말에 충격을 받아 보던 인터넷방송을 꺼버렸다. 그저 말문이 막히고 할말이 없다. 이게 오늘 대한민국 일부 사학의 민낯이다. 건학정신이 아무리 좋아도, 거기에 담긴 사람들에 따라 하루아침에 추락하는 게 세상사다. 결국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교육자라면 경찰서에 있는 학생을 학교로 데려 올 텐데, 경찰을 불러 학생들의 요구를 제압하려거나 경찰로 연행시키려는 그 발상만으로도 그 총장은 교육자일 수 없다. 자기가 살고자 경찰을 불러들이는 이는 교육자로서 기본 소양이 없는 사람이다. 이는 솔로몬의 판결과 같은 것이다.

자기 학교 학생을 경찰에 고발하려는  그런 의식을 가진 자들이 그동안 교육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분명 비극이다. 우리 사회 기득권층의 대대적인 의식개혁 없이는 구제 불능일 것이다.

누가 잘못된, 뒤틀어진 이 나라를 바로 세울 것인가? 그저 하늘 바라보기가 부끄러운 세상이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박도 지음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 시중 서점 판매 중(눈빛출판사 / 1만3000원).
#성탄카드 #이희호 #서대문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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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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