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 <동행> 출판기념회에서 해후(2008. 11. 12.)
박도
나는 두 분의 카드를 우편함 상자에 넣으면서 지난날 카드를 이제는 정리하고자 추스르는데 1985년 한 제자에게서 받은 게 눈길을 끌었다. 그 성탄카드는 나를 잠시 추억속으로 빠트렸다.
그는 1983학년도 입학한 박아무개 담임 반 학생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반 학생 가운데서 가장 먼저 외웠다. 그는 신입생 예비소집 일에도 가장 늦게 등교했고, 입학식 날에도 지각했다.
그는 입학을 한 뒤에도 출결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늘 초점을 잃거나 뭔가 쫓기는 듯한 불안·초조함이 보였다. 입학 후 보름이 지났을 무렵, 그 대신에 그의 아버지가 낙담한 얼굴로 내 자리로 찾아왔다.
"선생님, 제 집 놈이 서대문경찰서에 있어요. 선생님이 좀 구해주세요."'돌아온 탕자' 이야기나는 수업시간을 조정한 뒤 아버지와 서대문경찰서로 갔다. 그는 형사과 딱딱한 나무의자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었다. 그는 애써 나를 외면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마지 못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체념어린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경찰서에 들어설 때와는 달리 어떻게 하든 그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학교에서 잘 선도하겠습니다.""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담당 형사는 우악스럽게 생긴 인상과는 달리 그를 변호하며 내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나는 그 형사의 그 한 마디에 평소에 가졌던 형사들에 대한 좋지 못한 선입견을 말끔히 씻었다. 그가 왜 서대문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졌는지 굳이 이 글에서 까발리지 않겠다. 그는 경찰서에서 벌을 받을 만큼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나의 선도 약속 보증으로 그날 곧장 경찰서에서 훈방됐다. 나는 돌아오는 길 그에게 아무 염려치 말고 다음날부터 등교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등교치 않았다.
그 며칠 후 신촌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는 그의 아버지가 비린내를 풍기는 옷차림으로 학교에 왔다. 아버지는 나에게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선생님! 제 집 놈 좀 구해주세요. 제가 며칠을 두고 달래기도 하고, 몽둥이질도 했지만 끝내 학교를 다니지 않겠답니다."그날 퇴근길에 나는 그 녀석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내가 자기 집으로 찾아온 줄 알면서도 굳이 자리를 피해 있었다. 아버지·어머니가 끌어내다시피 내 앞에 앉혔지만 그는 계속 고개를 돌린 채 내가 묻는 말에도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1시간여 이런저런 얘기로 설득했다. 오랜 침묵 끝에 나온 그의 첫 말이다.
"선생님, 저 학교 그만두겠습니다."나는 다시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온, 한때 가정사정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쓰라린 얘기도 했고, 너의 가운데 이름 자(字)는 나의 아버지 항렬 자(字)로 너는 나의 아저씨뻘이 된다는 비굴할 만큼 최후의 간절한 말을 남긴 채 그 집을 떠나왔다.
이튿날 그는 등교했다. 나는 학급 학생들에게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를 따뜻하게 맞자고 호소했다. 반 학생들도 모두 호응했다.
그는 마침내 학생 본연의 자세로 돌아왔다. 그의 변신은 참으로 놀라왔다. 쉬는 시간이면 교무실로 찾아와 여러 교과 선생님에게 자기가 모르거나 이해되지 않는 점을 뻔질나게 질문했다. 그해 학년말 진급사정회 때 그의 이름이 성적우수자 명단에 끼어 있었다. 그 이듬해 연말 그는 우리 집으로 성탄카드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