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말했다, "기술이나 배워"

[편집자가 독자에게] <문과 출신입니다만>이 정말 말하고 싶은 것

등록 2017.03.21 20:52수정 2017.03.21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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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문과인이 정치와 경제, 말과 문장을 통해 '산'을 오른다면, 이과인은 수학, 의학, 공학을 이용해 똑같은 산을 오른다.

문과인이 정치와 경제, 말과 문장을 통해 '산'을 오른다면, 이과인은 수학, 의학, 공학을 이용해 똑같은 산을 오른다. ⓒ pixabay.com


영국에서 짧은 시간 동안 머무른 적이 있다. 논문을 제출한 후, 여느 유학생들이 그렇듯이 해외 취업의 꿈을 안고 런던으로 '상경'했다. 그러나 문과, 그것도 '계륵'이라 불리는 석사 출신의 동양인을 받아줄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그마한 NGO 단체에서 열정페이를 받으며 6개월을 버텼다. 그때 친한 언니가 늘 내게 했던 말이 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기술을 배워." 당시에는 '유학부심', '석사부심'으로 '내가 왜'라며 그 말을 흘려들었지만, 요즘엔 종종 이불킥을 하면서 그녀의 말을 되새김질한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와 '인구론(인문계 졸업생 90%는 논다)'이라는 신조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저 좋아하는 분야를 공부했고, 꿈을 위해 나름의 방식대로 노력하여 어느 정도 그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각종 조사기관이 발표하는 인문계/이공계 간의 취업률 차이와 임금격차로 인해 내가 걸은 길은 그야말로 '죄송한' 선택이 되었다.

그나마 나는 운이 좋았다. 요즘 공채로 입사하는 후배들을 보면, 과연 내가 이 친구들과 겨룬다면 토론면접, PT면접 등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취업 관문들을 하나라도 통과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어학연수는 기본에, 갖가지 자격증을 보유하고 졸업하기도 전에 직장인과 맞먹는 사회경험을 했어도,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전공'을 했다는 이유로 취업시장에서 배척을 당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야말로 문과의 수난시대다.

나는 '문송'하지 않다
a  <문과 출신입니다만> 책 표지.

<문과 출신입니다만> 책 표지. ⓒ 와이즈베리

<문과 출신입니다만>은 그런 측면에서 매우 사심 가득하게 작업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가와무라 겐키는 어느 모로 보나 보기 드문 '성공한 문과 출신'이다. 올해 초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새로 쓴 영화 <너의 이름은>의 프로듀서이자, <고백>, <기생수>, <전차남> 등 굵직한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만든 '신의 손'이다.

그런 그도 이과 콤플렉스가 있었던 모양이다. 수학과 물리가 싫어서 문과 대학에 진학했지만, 영화와 소설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이공계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저자의 말이 크게 공감되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곳은 모두 이공계 출신들의 차지인 것 같다면 괜한 자격지심이었을까.

일본어판 원서를 처음 접했을 때 '문과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줄 것이라 기대했다. 혹은 어떻게 하면 이과를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개월 후, 번역되어 내게 전달된 원고의 주요 골자는 문과의 생존 전략보다는 '이과로부터 배우는' 삶의 자세였다. 한 마디로 대략 난감이었다. 안 그래도 서글픈데, 이과의 얘기를 잘 듣고 배우라니! 그런데 저자가 말했다.

'처음에 나는 이과와 문과의 차이를 알려고 했다. 문과에 있고 이과에 없는 것. 이과에 있고 문과에 없는 것. 그 차이를 통해 각각이 해야 할 일을 찾아내려 한 것이다. 그러던 중에 깨닫기 시작했다. '이과와 문과는 똑같은 산을 다른 길로 오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본문 5쪽.


그렇다. 애초에 문과-이과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문제였다. 그것도 문과든 이과든 피해갈 수 없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말이다. 문과 출신으로 책을 만드는 나와 영화를 만들고 소설을 쓰는 저자, 이과 출신으로 제약연구를 하는 남편이나 게임을 만드는 동창까지 '어떻게 하면 사람이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그 답을 향해 각자의 방법으로 묵묵히 길을 간다. 문과인이 정치와 경제, 말과 문장을 통해 '산'을 오른다면, 이과인은 수학, 의학, 공학을 이용해 똑같은 산을 오른다.

"세상 일 중 20퍼센트 정도는 틀렸을지도 모른다."(요로 다케시, 해부학자이자 곤충 연구가), "부전승이야말로 최고의 승리법이며, 우유부단함은 현명함의 상징이다."(가와카미 노부오, 카도카와․도완고 대표이사), "조령모개(자꾸 이랬다저랬다 해서 갈피를 잡기 힘들다)가 최고다."(미야모토 시게루, 닌텐도 전무이사이자 <슈퍼마리오><젤다의 전설> 제작자) 등 참신한 어록도 많다.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이 뜨끔했던 가르침은 이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외주에 맡기지 말고 반드시 자기 자신이 하라."(다카하시 도모타카, 로봇제작자)

피할 수 없다면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아야 상황을 바꿀 수 있다. 2년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탄생한 이 책은 이과인이 걸어온 길에서 찾아낸 창의력과 시사점으로 가득 차 있다. 이과 특유의 '건들건들함'(좋은 말로 시크함)이나 엉뚱함은 문과의 세계에도 적용해봄직하다.

요즘 인문계 전공으로 진학했다 하더라도 취업 걱정 때문에 이공계로 편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 취업포털의 조사에 따르면 인문․사회계열 졸업생을 채용하겠다고 답한 기업이 6.8퍼센트였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이미 산의 정상에서는 문․이과의 융합이 진행 중이다.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국내 취업 현실과 대학의 교육정책이 안타깝다. 이 책을 통해 산의 정상에 더 많은 문과인들이 모이기를 바라본다. 이제, 문과도 흥할 차례다!
덧붙이는 글 서정희 기자는 미래엔 와이즈베리 에디터입니다.

문과 출신입니다만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인호 옮김,
와이즈베리, 2017


#문송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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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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