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펴낸 신간 <영초언니>.
문학동네
서평의 도입부, 이렇게 첫 문단을 쓴 지 일주일이 흘렀다. 이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맴맴 돌 뿐 좀체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난해한 책도 아니었다. 오히려 한 번 잡으면 끝장을 보게끔 하는, 독자를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는 책이었다. 1970년대 살풍경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왜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걸까?
그러던 차에 한 단어가 바람처럼 스쳐지나갔다.
'부채의식'.
그랬다. <영초언니>는 무의식적인 '부채의식'으로 나에게 스며들었다. 최근에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보고난 뒤, 뭐라고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었던 먹먹한 감정이 그랬다.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로, 얼마 전 청문회 과정에서 몸에 밴 검소함과 자기관리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김상조 교수의 '부채의식'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김 교수의 '부채의식'은 지난 6월초 그의 제자라고 밝힌 이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려 화제가 됐다.
"(김상조 교수님께) '왜 그렇게 치열하게 하시냐'고 물었더니, '부채의식 때문'이라고 답하셨다. 본인은 80학번인데, 학생운동에 별로 참여하지 않고 학교에 남아 공부만 했고, 그게 학생의 본분에 맞는 거라 생각했다. 학우들이 몸 내던지고 피 흘리며 죽었는데, 자신은 사회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거 같아 죄스러운 마음이 남아 그 미안한 마음이 '부채의식'으로 자꾸 남는다고 말했다. 자기 세대는 다들 그런 마음일 거라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긴급조치 9호'와 '산천초목 사건'<영초언니>의 화자는, <시사저널>(현 <시사IN>)과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지냈고, 현재 제주올레 이사장인 서명숙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서명숙의 <고대신문> 4년 선배였던, '영초언니' 천영초.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흐릿한 기억 탓에 벌어진 사소한 착오가 아니라면 모든 게 사실에 기반해 쓰여졌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조차도.
천영초는 1970년대 중·후반 운동권의 상징이었던 인물이다. 그녀는 서명숙과 후배들에게 '걸 크러시'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박정희 독재정권과 남성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토론하고, 저항하고, 행동하는 여학생들의 서클 '가라열'의 리더였다.
당시는 술자리에서조차 박정희와 정부를 비판하다 걸리면, 잡아다 족치고 가두는 무지막지한 '긴조(긴급조치) 시대'였다. 서명숙은 "1977년 그 해 겨울, 기록적인 한파가 한반도를 덮쳤지만, (영초언니와 가라열 멤버들 덕분에) 정신적으로 따뜻했다"고 기억한다.
1979년 4·19 기념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서명숙은 고향인 제주도에서 체포돼 서울로 연행됐다. 모교인 신성여고 교생실습을 나가기 하루 전이었다. 죄목은 '긴급조치 9호 위반'. 천영초를 우두머리로 하는, 이른바 '산천초목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당시는 수사·정보기관이 범죄 조직도(그림)를 먼저 그리고 난 뒤에, 퍼즐 조각처럼 조직원들을 끼워맞추는 '기획수사'가 만연했을 때다.
영초언니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명숙은 고문실로 변조된 한 모텔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성동구치소에 나란히 입감됐다. 사기·간통방에 막내로 들어간 20대 초반 여대생 서명숙의 눈에 비친 여사(女舍)의 일상 풍경은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름없는 들풀 같은 '소녀 장발장'들부터 박정희 유신정권의 종지부를 찍는 신호탄으로 평가받는 'YH무역 노조 신민당사 농성사건'의 주역들까지, 한 지붕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다.
'박근혜와 천영초, 동갑내기 여자의 다른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