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갯길을 지나다 보면 이런 당집을 만나곤 합니다. 저 안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한 저는 꼭 문을 열어 들여다보곤 합니다.
배석근
과수원 옆을 지나갑니다. 사과 과수원입니다. 아이들 주먹만 한 사과가 붉을 빛을 살짝 띠어 가며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영양의 특산물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게 고추 그리고 사과입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게 나는 산간지대여서 영양 사과가 맛있다고 합니다. 과즙이 많아서 한 번 콱 깨물면 즙이 입 밖으로 팍 튀고, 씹어 먹으면 아삭아삭 소리가 나는 명품 사과라고 합니다.
과수원을 지나 좀 가다 보니 당집이 하나 나타납니다. 제대로 모양을 내어 지었으면 '성황당'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텐데, 나무 골격에 함석 철판을 대충 얹고 붙여서 지은 집이라 그냥 '당집'이라 하는 게 어울립니다. 생긴 건 좀 허술해도 하는 역할은 같습니다.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해 제를 지내는 곳입니다.
저는 이런 당집을 만나면 문을 열고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문이 잠겨 있으면 할 수 없지만, 열려 있으면 꼭 문을 열고 들여다봅니다. 이 당집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잘 열리지 않는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안에 무엇이 있을까요? 단 위에 무슨 상을 모셨다거나 벽에 무슨 그림을 붙여 놓았다거나 하는 건 없습니다. 촛대 같은 제를 지낼 때 쓰는 도구가 한쪽에 있고 빈 술병도 보입니다. 축축하고 음산한 기운이 도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성황당은 사람들이 넘어 다니던 고갯길에 짓곤 했기 때문에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친근한 장소였습니다. 고갯길을 넘다가 비를 만나면 들어가서 잠시 비를 긋기도 하고, 날이 저물면 성황당 안에서 잠을 자고 날이 밝은 뒤 길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걸어서 고갯길을 넘는 사람이 없어졌으니 성황당도 자연히 사람들과 멀어져 마을에서 떨어진 고개 아래 을씨년스럽게 남게 됐습니다. 사람들과 멀어진 성황당은 그래서 쓸쓸하고 음침하고, 좀 무섭기도 한 곳으로 이미지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요즘 유난히 경조사 소식이 많이 들려옵니다. 지인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일상적인 것이고, 친구들의 아들딸이 결혼한다는 소식도 점차 빈도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본인상 소식도 가끔 전해져 충격을 받고 황망해 하기도 합니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경조사 소식을 접하면서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이 경조사에 참석할 것인가, 말 것인가, 부조는 얼마를 해야 할까, 이런 고민에 휩싸일 것입니다. 참석 여부가 분명하거나 경조금 액수가 정해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참석과 불참 사이에서 단번에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거나, 5만 원과 10만 원 사이에 왜 7만 원이란 경조금은 없는지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나름대로 원칙을 정했습니다. 경조사 소식을 접했을 때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망설여지면 그땐 무조건 가자, 부조를 5만 원 내야 하나 아니면 올려서 10만 원을 내야 하나 하고 고민하게 되면 그땐 올려서 하자, 이렇게 말입니다. 특히 조사에 대해서는 무조건 지키려고 합니다. 고인에 대한 마지막 인사이기도 하고, 고인이 저 세상으로 가면서 쓸 마지막 여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결심 18 / 경조사는 어지간하면 참석하자. 조사는 특히 그렇게 하자.낙동정맥은 영양군 석보면과 영덕군 지품면을 잇는 화매재를 가로질러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삼군봉에 이릅니다. 백두대간에 있는 삼도봉이 3개 도(경북, 충북, 전북)에 걸쳐 있듯이, 삼군봉은 3개 군(영양, 영덕, 청송)에 걸쳐 있는 해발 532m 봉우리입니다. 아까 올랐던 여정봉처럼 정상석도 없고 봉우리라는 느낌도 그다지 들지 않습니다. 다만 '준+희'라는 산꾼 부부가 정성스럽게 달아 놓은 팻말이 여기가 삼군봉임을 친절하게 알려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