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함'이 아니더라도 악행은 생각 없이 사는 순간 평범한 일상으로 스며든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정말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아가는 행위에는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을까. 그렇다면 윗사람이 시키는 행위는 언제나 절대적이고 선한 일인가.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조차 판단하지 않고 기계나 로봇처럼 일상에 매몰된 채, 생각 없이 지시에 따른 행위만 하며 살아간단 말인가.
아이히만은 독일 나치 친위대 장교였다. 강제수용소에서 그에게 희생된 유대인만 600만 명에 이른다. 독일 패망 후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이름도 바꾸고 가족과 숨어 지내다가 1960년 5월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됐다. 재판 끝에 사형을 선고받고 결국 형장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가 재판정에 섰을 때, 모든 언론은 '인간의 얼굴을 한 악마'를 보기 위해 취재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괴물'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실망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끔찍이 아끼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를 추적 관찰한 철학자는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저 상부의 명령만을 따랐으므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아주 근면했고 무능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가 엄청난 범죄자가 된 것은 순전히 성찰의 부재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생각 없는 삶은 이렇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공직사회는 물론이고 공기업과 사기업, 학교를 가릴 것 없이 그 어떤 조직이든 내부의 부정과 비리를 지시에 따라 행동한다. 이를 비판하고 지적하며 혁신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위해를 가하고 비난하며 따돌리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더러는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침묵으로 동조하는 그들에겐 과연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침묵을 통한 동조에도 분명 책임이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속한 조직이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명예가 땅에 떨어지며 와해되고 고통을 받는 순간 침묵의 동조에 대한 냉엄한 질책과 책임도 오롯이 요구되는 법이다. 침묵에 왜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 고민이 깊어지는 지점이다. 어찌 보면 우리 교육이 갖고 있는 심각한 병폐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지 못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가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그것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쳤다면 그래서 비판정신을 지닌 채 살 수 있는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면.
온 천하에 갖가지 부정과 비리와 모순의 적폐들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광장에 모여 태극기를 욕보이는 이들의 외침을 막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국가권력이 도청과 사찰과 미행으로 점철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정원의 직권남용과 초법적 발상과 행위가 저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검찰이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부정한 세력과 온몸으로 맞섰을 것이다. 사법부가 검찰의 비리와 은폐를 냉혹하게 심판했더라면 온 국민이 추운 겨울 내내 촛불을 들고 권력을 엎어버리기 위해 국민주권을 위임받은 통치자를 내쫓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깨어있는 민주시민을 육성해야 함이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이자 우리의 희망이다. 그래서 교육혁신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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