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청 건륭(乾隆) 57년 성균관 제술 시험의 합격자들과 희정당에서 연회를 벌이다. 성균관 제술(製述) 시험에서 합격한 유생을 희정당(熙政堂)에서 불러 보고, 술과 음식을 내려주고는 연구(聯句:서로 이어가면서 짓는 시)로 기쁨을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우부승지 신기(申耆)는 술좌석에 익숙하니, 잔 돌리는 일을 맡길 만하다.
내각과 정원과 호조로 하여금 술을 많이 가져오게 하고,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되, 잔은 내각(內閣)의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토록 하라.
승지 민태혁(閔台爀)과 각신 서영보(徐榮輔)가 함께 술잔 돌리는 것을 감독하라"하였다.
각신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오태증(吳泰曾)은 고 대제학 오도일(吳道一)의 후손입니다. 집안 대대로 술을 잘 마셨는데, 태증이 지금 이미 다섯 잔을 마셨는데도 아직까지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희정당은 바로 오도일이 취해 넘어졌던 곳이다. 태증(泰曾)이 만약 그 할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어찌 감히 술잔을 사양하겠는가.
다시 큰 잔으로 다섯 순배를 주어라."
하였다. 식사가 끝난 뒤에 영보(榮輔)가 아뢰기를,
"태증(泰曾)이 술을 이기지 못하니 물러가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취하여 누워 있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옛날 숙종조에 고 판서가 경연의 신하로서 총애를 받아 임금 앞에서 술을 하사받아 마시고서 취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였던 일이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 후손이 또 이 희정당에서 취해 누웠으니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하고, 별감(別監)에게 명하여 업고 나가게 하였다.
그때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니, '봄비에 선비들과 경림(瓊林)에서 잔치했다'는 것으로 제목을 삼아 연구(聯句)를 짓도록 하였다.
상이 먼저 춘(春) 자로 압운하고 여러 신하와 여러 생도들에게 각자 시를 짓는 대로 써서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취하여 짓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내일 추후로 올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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